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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말하는 ‘인간등급표’를 보면 부모의 자산과 소득에 따라 자녀 등급이 분류된다. 자산 20억원과 연소득 2억원 윗선은 ‘금수저’, 자산 5억원과 연소득 5500만원 아래는 ‘흙수저’ 등급이다. ‘은수저’와 ‘동수저’는 그 사이다. 이렇게 화폐 단위와 수저 등급을 연결시킨 현실 감각은 금, 은, 동, 흙의 재료 차이만 가리키지 않는다. 그 수저로 떠먹는 생활세계에서 뚜렷한 재질적 격차를 실감한다는 뜻일 게다. 진학, 취업, 결혼, 출산, 여가, 노후 등 생애 전반의 격차에 대해 일본 고베에서 창의적인 공동체를 운영하는 우치다 타츠루는 이렇게 통찰했다.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수한 후원자들로 이뤄진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이익은 주로 자기결정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것들이며, 그들이 속한 ‘강자 연합’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그가 무릅쓰는 리스크는 집단 전체가 방어해준다.”(<하류지향>, 2013, 민들레) 그는 목적어 ‘risk’를 취하는 동사 ‘hedge’와 ‘take’의 차이에 주목했다. 그 중 ‘위험을 낮추다(hedge risks)’란 “이해관계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어서 “작업량이 늘어나 귀찮기”는 하나 “치명적인 실패”나 “고립”을 미리 피해가는 ‘금수저의 전략’이다.

그럼 ‘위험을 떠안다(take a risk)’는 뭘까? “획득한 이익을 공유할 동료”나 “어려울 때 지원해줄 사람”이 없는, 즉 “상부상조 조직에 속”하지 않거나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오직 “자기결정”에 매달려서 ‘대박의 성공’ 아니면 ‘쪽박의 몰락’이라는 “자기책임”이 전부다. 여기서 통용되는 원리는 흑 아니면 백, 홀수 아니면 짝수의 양자택일이다. 로또 1등 당첨을 바라며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을 선택하는 ‘흙수저의 운명’은 기실 ‘동수저의 동경’이자 ‘은수저의 욕망’이다. 이 세계엔 폭격과 지뢰가 천지인 벌판을 각자 뛰어서 ‘당첨되든가 죽든가’ 복불복만 있다.

프랑스의 실천적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금수저’와 ‘흙수저’를 접했다면 문화자본의 획득 과정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가 말한 문화자본은 명품 갤러리와 재래시장의 소비 차이가 아니라, 비평적 안목과 풍부한 지식과 섬세한 감각을 좌우하는 사회적 관계의 격차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이해관계자, 후원자, 상부상조 조직, 네트워크의 두께와 깊이가 문화자본이다. 하여 이들 “집단 전체”가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모두가 ‘risks’에서 자유로워지는 ‘우리의 연합’이 문화자본이다. 이 세계에선 “자기결정”이 줄어들고 “자기책임”도 낮춰진다.

이 둘의 격차를 현대 인문학의 선구자 얼 쇼리스는 이렇게 단언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먹쥔 한 손을 올리며 말하고 있다 _경향DB


“여러분은 지금까지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여러분은 배우지 않았어요.”(<인문학은 자유다>, 2014, 현암사) “여러분”은 “자기결정과 자기책임” 아래 홀로 ‘위험을 떠안는’ 사람이다. “인문학”은 독서든 대화든 서로 환대하며 너에게서 나의 자리를 인정받는 사회적 관계다. 이것이 없는 “여러분”은 아직도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의 벼랑을 향하느라 “여러분을 공격하는 무력에 대응”하는 법은 물론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법”, 즉 문화자본에 무지하고 무감해진다.

우치다가 볼 때 ‘금수저의 전략’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의 성원들만 누리는 “혜택”을 만든다. 우선은 여러 위험들(risks)에서 한꺼번에 벗어나 안전하게 살아남는다. 해서 각자는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볼 수 있다. 반대로 ‘흙수저의 운명’은 저마다 낱낱의 위험(a risk)을 모두 감당해야 하므로 결국 백전백패로 수렴된다. 요컨대 예의 ‘인간등급표’를 부모의 경제적 계층 차이로 환원해서는 이해도 안되고 해법도 없다.

‘인간등급’의 재질적 차이에 대해 사회학자 에드워드 로이스는 지난 40년간 미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그 원인을 “철저히 경제 바깥”인 “권력의 문제”로 진단했다.(<가난이 조종되고 있다>, 명태, 2015) 흙, 동, 은이 ‘금수저’에게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주”는 것이 문제라는 그에겐 “정치권력을 획득”하라는 주문이 논리적이다. 같은 이유로 기성세대는 청년에게 투표에 참여하고 정당에 가입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정녕 그 힘이 투표와 정당 선택 이전에 청년들의 생활세계 어디에서 어떤 관계로 비롯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청년들은 무엇보다 지역에서 이해관계자, 후원자, 상부상조 조직, 네트워크라는 문화자본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 여러 방편이 지방분권과 마을자치의 영역에서 생기고 있다. 청년의 문화자본은 국가나 대도시보다 마을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에서 ‘흙수저’가 ‘동수저’ 및 ‘은수저’와 공유했던 문화자본이 2015년 지금 쌍문동에서 다시 만들어질 때다. 후기 근대의 마을은 결단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청년들의 문화자본으로 만드는 마을이다. 여기 생활세계에 청년의 ‘인간등급’과 정치권력의 새로운 만남이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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