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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어느 재단이 주최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다. 그 재단의 지원금을 받는 민간단체 실무자들이 사업성과를 공유하는 워크숍이었고, 앞부분에 이사장의 인사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행을 맡은 실무자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사장은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30분 정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말씀하시는데 끊을 수도 없고 매번 난감하다고 실토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장은 그 재단이 얼마나 훌륭한지 여러 가지 자료까지 곁들여가며 거의 강의를 하다시피 했다. 다행히(?) 20분 만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을 지원하는 재단인 만큼 지루함을 내색하지 못하고 묵묵히 경청했지만, 실무자는 미안함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장은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실무자는 행사 때마다 그런 곤경에 처하지만, 직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조직이 그러하듯, 이 재단에서도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걸러지지 않은 오점은 매번 그렇듯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직언해주는 사람이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권위주의 문화가 짙은 한국의 많은 조직에서는 그렇지 않다. 권력이 막강할수록 언로는 더 막혀 있다. 특히 이번 대통령의 경우, 쓴소리하는 측근들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어떤 총리는 ‘할 말은 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취임했지만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최고 인사권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지시 사항을 받아 적기에 바쁘다. 또는 감언(甘言)으로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다.

직언이 실종된 상황과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온갖 폭언들이 넘쳐난다. 인터넷의 악성 댓글,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괴담, 끼리끼리 모여서 부풀리는 험담, 특정 집단에 대한 악담과 혐오 발언, 사소한 갈등에도 곧바로 터져 나오는 욕설, 상황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며 내뱉는 극언, 해괴하고 허황된 논리로 점철된 망언…. 여러 가지 관계에서 여과되지 않은 채 쏘아붙이는 막말들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고 파국을 자초하기도 한다. 보선 참패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도 최고위원회의에서 오간 몇 마디 말들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직언과 폭언은 직설화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핵심을 바로 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미덕으로 장려되고 후자는 악덕으로 지탄받는다. 폭언은 상대방에게 모욕과 상처를 준다. 설령 그 내용이 맞다 해도 발언의 의도가 공격적이기에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반면에 직언은 어떤 잘못을 지적하되 그 궁극적인 목적이 상대방의 변화와 상황의 개선에 있다. 당사자들 사이의 사소한 자존심 싸움을 넘어서 공동체나 공공성의 구현을 바라는 순수함이 거기에 깔려 있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후보로 내정되었을 당시 '대통령에서 쓴소리와 직언하는 총리가 되겠다'라고 선언한 적 있다. (출처 : 경향DB)


직언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필요하다. 가족, 친구, 연인, 스승과 제자 등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냉정하게 지적해주어야 할 때가 있다. 어설픈 위로나 상투적인 격려보다 따끔한 직격탄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도움을 주고받기가 실제로는 쉽지가 않다. 나름대로 애정 어린 지적과 충고를 했건만, 상대방에게는 잔소리로만 들리는 경우가 많다. 아끼는 심정으로 훈계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꼰대질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표현 방식과 언어 감각 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경험의 차이가 그러한 간극을 낳는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조언자가 자신의 동기를 짚어 보아야 한다. 문제를 지적하면서 모종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어떤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직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대방의 성장이어야 한다. 그의 삶이 나아지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곁에 서서 같은 눈높이로 길과 비전을 탐색하는가. 멘토가 꼰대와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순수한 의도로 조언을 하는데도 귀담아듣지 않고 방어막을 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의 모습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의 자기를 미완의 존재로 여기면서 끊임없이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면, 직언이 감사한 선물이 된다. 반면에 취약함을 감추려고만 하면 불손한 참견이나 성가신 지적으로 여겨진다. 권력욕이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또는 자존감이 너무 낮으면 그렇게 반응한다. 과도한 자기애 그리고 허약한 정체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 관건이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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