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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가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자 당사자이다. 지리멸렬한 야권은 비판하기조차 민망하다. 언론 또한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의 입맛대로 대립과 싸움을 부추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할 시행령을 내놓은 정부, 권력의 속셈대로 유가족에게 지급될 돈의 액수부터 외워대는 언론, 그리고 인양을 반대하는 이유는 건져낸 배 안에 실종자 시신이 없을 경우의 허망함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어느 여당 의원의 발언은 글로 옮기기조차 불편하다.
불의 앞에 솟구치는 분노는 증오와 엄연히 다르다. 의롭지 못한 자들은 분노와 증오의 구분을 교묘히 흐리면서 분노의 원인을 숨기려 든다. 그러나 분노가 불의를 물리치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분노에 머무는 순간 맹목적인 미움으로 변질되기도 쉽다. 나라를 운영하는 집단이 국민들 사이의 갈등을 무책임하게 부추기는 지금이 그런 위기의 시간이다.
그래서 미국의 베트남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은 좋은 생각거리이다. 2012년부터 2025년까지를 50주년 기념기간으로 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선포문을 포함한 사업의 성격은 참전군인들의 용기와 희생에 감사와 경의를 보내는 쪽에 치우쳐 있다. 물론 격렬한 반전운동에 부딪히는 가운데 참전군인들이 이중으로 상처를 입은 과거에 대한 깊은 배려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애국심만 강조하는 가운데 명분 없는 전쟁의 역사적 진실이 손쉽게 가려진다. 300만명이 넘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인명 피해는 까맣게 잊힌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미국 정부의 기념사업은 자기 땅을 지키려 싸운 베트남 민중과 잘못된 전쟁에 반대한 수많은 자국 시민에 대한 무시와 모욕, 증오를 감추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명분 없는 전쟁을 벌여 온 미국의 실상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참전군인의 경험이 그저 헛된 것이었다고 맞받아치면 증오의 정치라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미국의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은 미국 국민이 참전용사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고 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가 싸우게 한 데 대해, 이후의 삶이 후유증으로 망가진 일에 대해,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을 돌보는 일에 등한했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자세가 먼저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경찰관 4명과 계엄군 23명을 잃었다. 계엄군 전사자의 절반은 5월24일 매복 중이던 광주 지역의 군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나타난 특전사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해 대전차포 등으로 기습한 사건에서 나왔다. 이미 특전사 부대는 어린이도 섞인 길가의 주민들에게까지 총격을 가하면서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계엄군 간의 교전으로 수십명이 죽고 다친 참변 직후 아예 제정신을 잃고 인근 마을을 뒤져 죄 없는 청년들을 끌어내 사살했다. 극우 인사의 저서도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고 기록한 일이다. 그 눈먼 증오의 순간이 수십년이 지나도 참혹하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초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어머니의 노래>(MBC)와 <광주는 말한다>(KBS)가 언론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어렵사리 방영되었다. 철저한 언론 검열 탓에 진상을 잘 몰랐던 국민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이 있었다. 두 기록영상물 중 하나는 당시 사망한 군경의 어머니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말씀을 마지막 자막에 담았다. 학살의 참상에 충격받고 분노하던 그 시점에서 아무도 27명의 어머니와 가족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이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시달렸을 그들을 기억했다. 분노가 자칫 증오로 변질되지 않게 막는 법을 일깨워주었다. 진실의 전모를 규명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미움을 극복하는 화해와 평화의 작은 촛불을 밝혔다.
군사반란에 동원돼 잔혹한 행위를 저질러야 했던 계엄군들의 무너진 삶 또한 위로받아야 한다. 만약 우리 사회의 민주역량이 더 성숙하고 더 강했더라면, 신군부는 감히 그처럼 잔인하고 공격적인 진압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싹을 자르려 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민뿐만 아니라 군경의 희생도 피할 길이 있었던 것이다.
4·16가족협의회가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 후 가진 세월호 가족 결의 의식에서 단원고 희생자의 어머니가 삭발을 하며 울고 있다. (출처 : 경향DB)
화해와 평화에는 진실이라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언론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이들이 27명의 어머니에게 깊은 위안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과 성과 덕분이었다. 오늘 이 순간 슬픔과 분노를 딛고 세월호의 어머니와 아버지들도 진실의 길을 열고 있다. 정부의 시행령을 당장 폐기하고 진상조사를 보장해야 마땅하다.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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