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절로 지금의 대선판과 후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김영삼은 저 1971년의 선거로부터 무려 거의 한 세대 지속된 ‘민주화’의 여정과 그 역사를 이끄는 거인이 되었는데, 지금 대선 후보들은 어떠한가? 그리고 이번 대선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유력 후보들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든가 ‘법과 상식의 화신’ 같은 말이 있다지만 이런 소리를 믿는 유권자는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직도 다 드러나지 않은 비리와 시민의 평균에 못 미치는 무지와 부적격이 외람돼서 쳐다보기조차 민망해지는 게 사실에 더 가깝지 않나?
이번 대선에서도 ‘무조건 승리’를 위해 동원되는 책략과 거짓된 선동이 있으며, 반대로 놓칠 수 없는 대의와 원칙이 있다. <킹메이커>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의해 택해진 ‘무조건 승리’의 전술이 지역감정의 조장을 통한 영호남 갈라치기였다고 말한다. 그렇게 박정희는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불과 몇년 뒤에 부하의 총에 의해 비명횡사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조작된 신화며 차별의 기제이기도 했던 ‘지역감정’과 싸우며 먼 길을 돌아 ‘민주화’로 가야 했다.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최악의 대선’이라 하는데, 무엇이 최악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잘 안 보인다. 실로 이번 대선판은 한국 정치가 제도와 정념의 면에서 김민하의 책 제목처럼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상황과 묵은 원한감정이 동원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상황도 있다. 집권당이 여전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선거를 치르려 했지만 오히려 부패집단으로 몰리고, 야당이 ‘우리가 원래 좌파’라며 집권하면 ‘적폐청산’하겠다는 상황은, 조국 사태 이후 기존의 진보·보수의 위상과 현실정치의 규범이 거대한 혼돈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아직 제대로 언어화하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가 지각 위로 점점 확연해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최악’의 가능성인데, 혐오와 차별이 선거의 주요 전략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이런 약삭빠른 기획을 했는지, 누가 과거의 지역감정 같은 허구적인 갈라치기를 통해 이 사회의 모순을 호도하고 유권자의 눈을 가리려 하는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혹자들의 ‘나라 망한다’는 말이나 브라질 같은 나라와의 비교는 수사로도 안일하고 설득력도 약하다. 세계체제 안에서의 경제력, 지정학적 자리, 문화적 위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은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도 일정하게 진행된 자칭 ‘(눈 떠보니) 선진국’ 아닌가.
그런데 여전히 ‘구조적 차별’하에 사는 취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은 심각하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지방의 청년, 이주민들에게야말로 최악의 대선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단지 젠더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백래시’가 문화가 되고 고삐 풀린 ‘차별’이 기세와 뒷배를 얻어 공공연하게 약자와 소수자들을 공격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브라질보다는 차라리 도널드 트럼프 당선 후의 미국을 떠올려본다.
불평등 체제를 바꾸고 싶고 또 바꿔야만 하는 대중과 젊은 세대의 분노와 절박한 상황이 적절한 대변자를 못 가진 채로 있고 또 그것을 이용하고 오도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후보와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최악’의 구조적 배경일 것이다. 물론 이는 현 집권세력이 해결하지 못해 깊어진 불평등의 증환이다. 흔히 ‘우파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차별과 자해의 기제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치유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다차원적 불평등의 고리를 하나라도 끊어 ‘차별 없는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야 하는 것이 2022년 대선의 민주주의사에서의 의미로 보인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