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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5511번 시내버스가 상도동의 고갯길을 넘어섰을 때였다. 정지신호로 버스가 멈춰 섰다. 의도하지 않게 바깥 풍경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차창 밖의 벽에는 ‘선거벽보’가 부착되어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분이 벽보 앞을 지나다가 유독 두 군데에서 멈춰 선 장면이 눈에 띄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분이 멈춰 선 포스터는 ‘바꾸고 싶다면 사회주의’라고 쓰인 것과 ‘자유 우파 구국 대통령’이라 적힌 것이었다. 순간 ‘아, 우리 사회도 정치적 열망이 폭넓게 표현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작게 감동했다.

1987년 대선 시기의 구호 중 하나가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였다. 민중의 시대로라니, 너무 좋아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 후로도 많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이번이 일곱 번째다. 대선은 한 명의 당선자를 뽑는 과정이지만, 민중의 열망이 구호로 외쳐질 수 있어 좋다. 이번 선거에는 ‘기본소득’ ‘땀’ ‘기회’ ‘걱정 없는 세상’ 등이 등장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대중의 욕망이 선거기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선거의 축제적 기능이 좋다.

14인의 대선 후보 벽보 앞에 멈춰 선 한 사람을 보며, 대중의 각기 다른 열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대중은 집단성이 요동치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통제되지 않는 행동력을 분출한다. 혁명의 열정은 민중의 힘이라고 불리고, 대중의 광기로 일컬어지기도 하며, 집단지성의 영리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물과 같이 잔잔히 흐르는가 하면, 갑자기 불어난 강물처럼 무섭게 요동친다. 나는 그 우발적 에너지를 여론 조사 결과에서 발견하곤 한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를 통해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무엇 때문일까? 두 유력 대선 후보만 예로 들어 보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작년 11월 중순경에는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열세였다가, 올해 1월 초순경 우세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2월 초순경에는 다시 열세였고, 2월 말인 지금에는 완연한 회복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반대다. 11월 중순경에는 열세였다가, 1월 중하순경에는 강한 우세처럼 보였다. 그런데 2월 말인 지금은 초박빙으로 엎치락뒤치락한다. 여론 조사 기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여론의 큰 틀에서의 경향성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대중의 마음은 수시로 움직이고 있다.

제20대 대선이 코앞인데도 여론조사 결과로는 당선자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의뢰기관, 여론조사기관, 조사 방법에 따라 결과도 상이하다. 낮시간대에 하면 청장년층의 응답이 어렵고, 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하면 거짓 답변을 걸려낼 수 없다. 그래서 현행 여론조사의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다른 방식으로 여론의 흐름을 읽어보면 어떨까? 여론 조사의 대상인 대중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변화한다. 대중은 여론조사에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지 않는다. 대중은 여론조사를 통해 정치권력과 협상하는 영리한 주체들이다. 여론조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여론조사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보자. 최저임금인상 찬반에 대한 후보자들의 대응에 따라 청장년층은 지지후보를 변경한다. 코로나19와 백신 패스에 관한 정책에 따라 지지후보를 바꾸기도 한다. 후보자는 대중의 선택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변화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대중은 오직 선거기간에만 정치권력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대중은 일상이 아닌 사건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협상한다.

한국의 대선은 5년마다 치러지는 방향지시등의 변화다. 그 결정이 오는 3월9일 투표 참여자들에 의해 이뤄진다. 지금은 서스펜스의 상황이다. 서스펜스는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말한다. 거장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폭탄이 터지는 것에는 공포가 없다. 공포는 오직 폭발이 일어나리라는 예감에 존재한다”고 했다. 선거날 폭발이 일어난다. 그전까지는 오차범위 내 백중세, 예측불허의 초접전이 지속될 것이다.

3월9일이 지나면 14인의 포스터들도 사라질 것이다. 대선 선거운동 기간에 곳곳에서 들끓던 열정들, 신문 지면에서 비중이 높아만 가던 정치 기사들도, 그리고 인터넷 상의 댓글 논쟁도 지금보다는 잠잠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들끓는 대중의 열정들을 즐겨야 할 것이다. 정치권력과 대중의 긴장은 대중의 결정에 따라 요동친다.

대중은 영리하면서도, 힘이 세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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