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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저학년 때 종종 ‘비권 총학생회’라는 말을 들었다. 비권은 비운동권의 줄임말이다.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니, 정치판과 연결 없는 ‘순수한’ 후보자라는 말이었다. 정치와 순수하다는 형용사가 대치되는 말이었던가, 고민했지만 이런 의문에 속 시원히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최근 정치판이란 단어를 다시 들었다. “고3 교실까지 선거판으로 만들고 정치판화해야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서다. 얼마 전 통과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한 자유한국당 의원이 다그치며 뱉은 질문이다. 이 개정안이 담고 있는 18세 선거권 연령 하향의 내용에 대한 반응이었다. 국회의원은 이 정치체제의 꽃이라는 선거를 통해 직업과 명예, 지위를 얻은 사람이다. 정치판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다른 공간을 선거판, 정치판으로 만들지 말라고 다그친다니 좀 모순적이지 않나. 본인의 존재를 폄하하는 말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정치가 순수하다는 형용사와 대치될 수 있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순수함이 부패하지 않았다의 다른 말이라면 이해할 것도 같다. 지금의 정치판은 오랜 시간 시민이 감시하여 쟁취한 결과다. 지난 시민운동의 역사가 없었다면 더 부패하고 정말 ‘더러웠’을지 모른다. 위 발언은 본인의 정치활동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양상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연말 국회는 아수라장이었다. 시민의 개혁 열망을 뒤로한 당리당략, 그로 인한 자가당착만이 가득했다. 특정 정치인, 특정 정당의 정치적 이익 보장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정치라면, 맞다. 교실을 정치판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게 정말 정치인가.

이제 대학 총학생회는 비권과 운동권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학생의 위치에서 20대가 누려야 할 권리를 말한다. 최근 대학사회에서 가장 크게 청년들의 공감을 얻은 이슈는 부당한 입학금 폐지, 계열별 차등등록금 개선, 성희롱 교수 퇴출 및 교내 인권센터 설립, 기숙사 확충 등이다. 사회경제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일상의 문제이고, 인권의 문제다. 지난 세대에 정치의 필요가 거대권력과의 투쟁을 통한 시민권과 노동권의 성립이었다면, 지금 우리 세대의 대의는 바로 이런 것이다.

요구는 달라졌지만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를 대변한다는 거다. 선거 때에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현실적 요구를 정책으로 만들 줄 아는 대표자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최근 정당들의 인재영입 뉴스를 보면 조금 의아하다. 장애, 경력단절 등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극복’해서 큰 성공을 한 누군가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해보겠다고 한다. 화려한 삶의 전적은 알겠지만 누구를 대변하며, 어떤 정치활동을 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는 순수하지 않다는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당들이 최근 몇 년 새 우후죽순처럼 만든 ‘정치학교’ 출신 청년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계발서의 주인공 같은 인재들을 보면 정치는 역시 히어로들의 전유물인가 싶기도 하다.

얼마 전 정의당 대변인이 된 강민진 대변인은 청소년참정권 활동을 했던 지난 경험에 비추어, “나의 삶 전체가 정치다.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제도권 정치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을 시작한 이유는 단지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였다”고 인터뷰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그래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나의 권리들이 궁금하고, 또 돌려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 권리 회복을 위해 활동한 사람들, 그 삶을 ‘정치’라고 당당히 말하는 내 세대 동료들이 정치인이 되면 좋겠다. 이런 정치인이 많아질수록 변화가 더 가까워질 거라 믿는다. 

이 시대의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지. 아직도 부끄러운 정치만을 정치라고 알고 계시는 분과, 히어로가 세상을 바꿀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주실 때도 됐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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