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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갈대들이 차례로 엎드린다

바람이 지나가는 중이다



바람도 생각이 있어

여기를 가고 있다



거대한 생각의 몸이

수많은 말들을 쏟아 놓으며

시원스런 걸음으로 지나간다



갈대들은

엎드려 그 말들을

받아 적고 있다



문효치(1943~)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갈대밭에 바람이 지나간다. 갈대들이 몸을 매우 굽히고, 몸을 바닥에 댄다. 바람은 생각을 하면서 갈대밭을 지나가고, 갈대들은 엎드린 채 바람의 생각을 적고 있다. 이 시에서처럼 누군가를 혹은 어떤 대상을 “거대한 생각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혹은 그 대상에게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이를 여러 가능성과 다양성을 지닌 활물(活物)로 보게 된다. “거대한 생각의 몸”이므로 “수많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자연(존재)의 보법(步法)은 시원시원하고 큼직큼직하고 당당하다.

한쪽에서 말하고 다른 쪽에서 그 말을 받아 적는 관계는 아름답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하지 않을 때 관계는 아름답게 된다. 김종삼 시인은 한 산문에서 “사랑의 손길이 오고 가는 아지랑이의 세계(世界)”라고 썼다. 우리의 관계에서도 아지랑이처럼 사랑의 감정이 눈에 아른아른하면서 움직였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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