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리 헌법은 1948년에 제정된 후 40년 동안 8차례 개정됐다가, 1987년에 9번째로 전부 개정됐다. 그런데 헌법 본문의 맨 앞에서 국가의 기본원리를 천명하는 ‘총강’ 부분(제1조~제9조)은 1987년 헌법에서 평화통일의 원칙을 새로 명시한 것 말고는 제정 이래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헌법의 기본구조와 기본권에 관해서도 제정헌법에서 이미 뼈대를 갖추었다. 헌법 총강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해 제정헌법 당시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을 두어왔다. 그럼에도 헌법 개정이 잦았던 이유는 그만큼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집권정부의 필요에 따라 헌법을 손질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왔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헌법은 국가의 근본법이기 때문에 자주 고칠 게 못 된다. 시대가 흘러 국가의 규범으로 선언돼야 할 새로운 가치를 담은 의제가 있는 경우 그때 헌법은 개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렇듯 평균 5년에 한번씩 개정되던 헌법이 1987년 이래 현재까지 30년 동안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1987년 헌법을 통해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되면서 선거민주주의시대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30년도 대통령 탄핵으로 마감될 만큼 순탄치 않았다. 1987년 당시 30대를 맞았던 내 기억에 의하더라도 그동안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험난한 과정을 진저리칠 만큼 겪어온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런 헌법의 연혁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1987년 헌법개정 이후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우리 힘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헌정시대를 열어왔다고 평가할 만하다.

지금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개헌이 자주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며, 헌법은 국가의 규범적 가치를 담아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성격을 갖는 것이니만큼, 지난 30년 사이에 새로 담아야 할 규범적 가치의 의제가 무엇일지는 반드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필수적으로 다뤄져야 할 의제는 ‘환경국가원리’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법제와 같은 각국의 근대적 법체계에 환경권이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유엔 인간환경회의’ 개최 이후였다. 이 회의는 113개국 정부대표가 참여한 최초의 국제환경회의였고, 여기에서 7개의 선언문과 26개의 원칙으로 구성된 ‘유엔 인간환경선언(Declaration on the Human Environment·스톡홀름선언)’이 채택돼 지구환경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인간환경을 보호하고 개선하는 일은 세계인의 절박한 소망이며 모든 정부의 의무이기도 하다”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해 인간환경을 지키고 개선하는 것은 세계 경제사회발전과 평화의 기본적이고 확립적인 목표와 함께 모두 추구해야 할 인류를 위한 필수적인 목표이다”라는 게 이 선언의 내용이다. 우리 헌법은 1980년 제8차 개헌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으로 환경권을 도입했다.(현행 헌법 제35조,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유엔 인간환경회의’ 이후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엔을 중심으로 지구환경보존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계속 있어왔으나, 환경 문제가 더 나아지진 않았다. 환경권을 도입하고 환경법제를 마련해온 우리나라의 사정도 엇비슷하다. 도리어 이제는 재앙 수준의 환경위기가 거론되는 분위기가 됐다. 2015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본회의에서 195개 당사국이 모여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을 담은 협정을 채택했다. 이로써 산업화단계에서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며, 인간이 기후변화를 초래해서 자칫 이번 세기 안에 전 지구적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인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2015년 9월에 유엔 정상회의에서 17개의 발전목표와 169개의 세부 이행 과제인 지속가능발전목표가 포함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2030 의제(The Agenda 2030 for Sustainable Development·SDGs)’가 채택, 발효됐다. 이것은 각국이 공동으로 추진해나갈 목표인데, 핵심가치는 “인권, 평등, 지속가능성”이라는 3가지 기본원칙을 반영하는 “사회발전, 경제성장, 환경보존”이 인류 발전의 포괄적인 공동의 축이 되었다는 데 있다. 특히 지속가능성에 최우선적 방점이 찍혔다 볼 수 있는데, 환경보존 문제가 그만큼 중요한 시대적 추세여서 각 국가의 국정기조가 되어가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당시에 이러한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는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 당시는 세계화가 대세였다.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는 정부도 국정원리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SDGs의 세 축 가운데 사회발전과 경제성장은 현행 헌법에 반영돼 있으나 지속가능성이라는 환경보존의 가치는 누락돼있다. 현재의 환경권조항은 국민 개인의 주관적 권리이기에 이것만으로는 미세먼지와 같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수의 원인으로 비롯되는 환경위기를 대처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현 시기 지속가능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발전, 경제성장과 아울러 환경보존을 위한 국가원리가 환경권조항과는 다른 형태로 천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개헌논의는 사실 성격상으로는 1987년 헌법개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1948년 제정헌법당시부터 헌법 총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의 원리를 현실화하기 위해 87년 6월항쟁과 그 정신을 담은 헌법개정이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다시 30년 뒤에 대통령 탄핵과 개헌논의를 불러왔다. 이것은 헌법에 천명된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원리에 공동체의 현실이 부합돼가는, 선헌법 후가치화의 과정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는 미래지향적 비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가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아가 미래세대의 비전으로 공유하고 실현해야 할 가치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있다. 이것이 ‘환경국가원리’ 도입의 필요성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이유이다.

<강금실 | 법무법인 원 변호사·포럼 지구와사람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