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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치·사회적 혁신 혹은 그것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다. 국내외의 역사적 경험을 볼 때에도 그러하고, 법과 제도의 기본적 특성을 감안할 때에도 그러하다. 가령 1987년의 개헌을 통해 탄생한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라는 정치·사회적 혁신의 소산물이다.
1789년 이후 약 230년 동안 총 27차례 수정된 미국의 헌법 역시 마찬가지다. 노예제를 폐지한 1865년의 헌법수정은 남북전쟁까지 치르며 이루고자 했던 정치·사회적 혁신, 즉 미국 산업화의 소산물이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1920년의 헌법수정, 흑인의 투표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 1964년의 헌법수정, 투표연령을 18세로 낮춘 1971년의 헌법수정 모두 여권신장운동과 흑인민권운동 그리고 청년운동이라는 정치·사회적 혁신의 결과물이다. 연방의회 의원들이 임기 내에 자신들의 봉급을 두 번 이상 올리지 못하게 한 1992년의 헌법수정도 그러하다.
이상의 사례들은 새로운 법과 제도가 정치·사회적 혁신의 선행물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정치·사회적 혁신의 과정에서 기존의 법과 제도로는 새로운 생각과 이해관계를 담아낼 수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새로운 법과 제도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대 국회가 출범하자마자 개헌 논의로 분주하다. 이번 개헌 논의는 정세균 국회의장이 20대 국회 전반기까지 개헌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정 의장은 지난 30년간 사회의 다양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헌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까지 했다. 정 의장뿐만이 아니라,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여당과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도 각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헌의 필요성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와 5년 단임제의 폐해를 고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인지 민주화 이후 개헌론이 다시 등장한 1990년대 말 이후의 역대 국회 중 그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16일 국회 의장 접견실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어 20대 국회 전반기 운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_경향DB
개헌 논의가 불거진 최근, 몇몇 정치학자와 언론인 그리고 국회의원을 만나 물었다. “개헌,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개헌이 실제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느냐”고. 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제왕적 대통령제나 단임제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정치권의 동의폭이 넓기는 하지만, 여전히 정치적 이해관계와 셈법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개헌이 성사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헌 논의가 여전히 ‘정략의 목책’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정 의장의 이번 개헌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닌, 역대 의장처럼 ‘취임 퍼포먼스’를 한 것이라는 냉소적인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필자 역시 그리 보고 있다. 딱히 신임 국회의장의 ‘관행적’인 취임 퍼포먼스로 보지는 않지만, 아직도 정략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해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든 권력을 차지하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권력의지의 정략’만으로는 개헌과 같은 큰일을 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총칼을 앞세운 독재정치 체제가 아니고서는 특히 그러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개헌은 정치인의 권력의지만으로 이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국민 과반의 투표 참여와 투표자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절차만 고려해도 개헌은 국민 다수의 의지, 즉 주권자의 ‘일반 의지’가 만들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지금 일반 의지를 만들 수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놓여 있는가? 정치권은 그런 조건을 만들며 개헌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실행하고 있는가? 또 개헌을 향한 권력의지의 발현이 본래의 의도처럼(?)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개헌을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 어느 정치인도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에서 개헌은 정 의장의 주장과 달리, 이제서야 비로소 논의의 본격적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일 따름이다. 그것도 아직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논의의 대상일 따름이다. 특히 정치·사회적 혁신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정치·사회적 혁신의 목표와 방향도 분명치 않다. 분권과 자치와 협치가 제기되고는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열망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분권과 자치와 협치가 지역이기주의와 책임회피와 담합에 그치지 않고, 삶의 질 증진으로 이어질 것인지 확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월호와 구의역의 비극’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현실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이런 현실에서는 무엇인가를 열망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뭔가를 열망하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를 너무나 자주 받았다. 그래서 너무나 많이 지쳐 버렸다. 죽음에 비견할 고단함, 정치권이 개헌을 추진할 때 제일 앞서 헤아려야 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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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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