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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공효진)은, 엄마의 애인인 유부남의 집에 쳐들어간다. 온 가족이 모인 단란한 식사 시간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아저씨! 우리 엄마 진짜로 사랑해요?”라고 묻는다. 아저씨는 자기 부인과 자녀들 앞에서 차분하게 말한다. “그래, 나 너희 엄마를 죽도록 사랑한다.” 거짓말을 기대하고 ‘불륜 아저씨’ 집에 화풀이를 하러 갔던 주인공은 풀이 죽어 돌아선다.

나는 인간의 진정성을 믿지 않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진정성만큼이나 거짓말도 논쟁적이다. 거짓말이 항상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속된 말로 면전에서 ‘생까는’ 거짓말은 누구에게나 상처가 된다. 몇 분이면 탄로 날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을 갑자기 잡아떼는 경우, 오랜 친구의 속임수…. 이런 일을 자주 겪다보면 제정신을 간수하기 힘들다. 타인의 잦은 거짓말은 인간의 판단력을 무너뜨린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세 커플의 ‘안타까운’ 혼외 사랑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 시간, 비용, 지력의 손해가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상담료를 청구할 생각은 없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무 이해관계 없이 고민을 들어주었으나, 지금 나는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살인 사건의 증인처럼 ‘도망 다니는 신세’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내가 ‘오해’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적도, 그럴 이유도 없다.

시민들이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3차 범국민행동에 참가해 촛불로 글씨를 만들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며칠 전까지 내게 연애 상담을 했던 이들의 필사적인 책임 전가에, 억울하다기보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짐승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지면에 쓸 사연도 아니고 내용도 복잡하다. 그들은 자신의 ‘부정(不貞)’으로 인해 부정(不正)한 일이 생기자 이를 학력주의, 언론탄압 등으로 프레임을 이동시켰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의 성격(결벽증)을 문제 삼아 “이상한 여자의 의심”이라고 떠들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혼외 관계에 관대했다. 한마디로, 그들이 비난받은 이유는 ‘불륜’이 아니라 관계를 이용해서 공정치 못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제는 돌변하여 “아무 관계도 아니다”라며 펄쩍 뛰고 있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절친의 배우자와의 사랑, 내연 관계를 이용한 횡령, 애인을 낙하산으로 취직시킨 경우. 결국 사랑보다 비즈니스다. 그들의 필사적인 거짓말은 능력은 없는데 유명세, 돈, 자존심은 유지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가족, 학력, 연줄은 비난받지만 혼외 사랑은 드러나지만 않으면 ‘동아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여성 모두 여성스러움을 무기로, 남편과 애인의 친구들까지 십분 활용하여 ‘페미니스트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들의 거짓말은 e메일이나 통화 기록 등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윤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들 최순실급 정도만 아니면 눈감아 주자고 한다. 최순실 정국의 최대 수혜자다. 그들은 모두 사회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이어서 거짓말에도 능숙하다. 거짓말과 비방도 이 시대에는 능력인 셈이다.

그런 와중에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데, 대통령이 나보다 더 멍한 표정으로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거짓말, 연기조차 할 수 없는 사람? 아니, 그저 자신의 기본 업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정파탄도 파탄이지만 촛불정국 전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저런 수준인지 몰랐다”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무엇인가? 학부 전공인 전자공학일 리는 없고 뭐라도 아는 분야가 한 가지라도 있는가? 국정 관심사는 무엇인가. 테니스? 앞서 말한 무고한 타인을 짓밟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은 세상을 파멸시키고 있고, 이를 통제해야 하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 우주의 기를 독점하고 있으니 완벽한 조합이다.

박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짓말 각본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력’ ‘통치력’이 전무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현실감각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의 전제인 자기 파악이 안돼 있다.

지금 232만명이 거리에 나온 이 시국에 대통령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놀라운 점은 대통령이라는 자의 ‘백치성’이다. 누구처럼 학살자도 아니고, 박식한 사람도 아니고, 바로 전직이었던 이처럼 축재한 사람도 아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성형(설), 피부 관리, 공주놀이(해외순방)를 하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는가. 단지, 간신에게 휘둘린 것인가. 부모가 빙의되는 과정에서 ‘에러’가 난 것인가.

그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자, 혹시 향후에 정 많은 한국인들이 그의 백치성을 불쌍히 여겨 용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끔찍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나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국가 지도자가 이런 유형인 경우 국민은 의미 없는 고민에 빠지고, 공동체는 분노와 의구심으로 소진된다. 박 대통령의 능력은 단 하나, 유신의 유령이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고, 내가 민주주의보다 상식을 원하는 이유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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