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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문화계 성폭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트럼프 당선으로 최순실씨 뉴스가 가려진다는 우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 규모나 처벌받을 사람들은 다르지만, 2016년 우주의 ‘나쁜 기운’임엔 틀림없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결과가 의외이거나 경악스러울 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난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런 부류다. 트럼프는 당대를 대변하는 인간형이다. 대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가 무너진 지 오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사람보다는 자신이 욕망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직업 정치인의 기업인화, 연예인화, 이것은 정치 자체의 붕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8일 (출처: 경향신문DB)
문제는 또 있다. 내가 욕망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그냥 부자인지, 자수성가 타입인지, 인격자인지, 똑똑한 사람인지…. 미국의 선거 전문가와 언론은 트럼프의 음담패설 시리즈 이후 클린턴의 낙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 사회의 논리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상한’ 분들이 지도자인 세상이다.
트럼프의 여성, 인종 관련 발언은 단순한 음란, 패륜이 아니다. 폭력이고 혐오 범죄다. 나는 그가 음담패설을 하면 할수록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보았다. 주요 지지층인 백인 남성들, 즉 평소 트럼프처럼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그의 말은 ‘사이다’였을 것이다. 그 해방감과 쾌감. 여성 비하, 이민자 혐오가 전 지구촌에 울려퍼졌다. 트럼프의 승리는 선거 전략인, 막말의 승리다.
트럼프로 인한 나의 좌절감은 단순한 국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이다. 문화평론가 서동진 교수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광풍에 대응하는 개인의 자기계발 현상을 분석한 빼어난 작품이다. 이 책의 후속편이 나와야 한다. 지금은 자기계발을 넘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다. 자기계발이 개인의 성실성(‘노~오력’)으로 구조를 극복하려는 소박하지만 처절한 대응이라면, 각자도생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에서 생존 여부를 목전에 둔 인간의 지옥도다.
각자도생은 말 그대로, 혼자의 힘으로 생존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도(試圖)’다. 시도는 성공이 아니므로 ‘성공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는 개인의 세상을 향한 전면전이다. 물론 그 방식은 최씨 사태에서 보듯이 규모의 한계도 염치의 한계도 없다.
한국 사회의 오래된 현상, 힐링 열풍과 더불어 자살과 우울증의 ‘범람’은 각자도생의 결과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나은 사람이다. 더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는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인간관계에서 상처와 배신이다. 여기서 가해자는 사회 적응자로, 피해자는 루저가 된다. 옳고 그름이 승패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살아온 이력 때문인지 내 주변에는 대개 진보 진영이나 여성주의자가 많다. 흔히 도덕적일 것이라고 기대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내 경험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폐쇄성이 겹쳐서 그런지, 이 ‘판’도 만만치 않다. 규모가 작을 뿐 ‘우리 안의 최순실, 트럼프’가 한둘이 아니다. 성폭력은 기본이고, 사기, 표절, 계급주의, 학벌주의, 소비주의, 연줄 문화, 약자에 대한 모욕과 막말, 이중성…. 내가 페이스북 근처에 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사람들이 그곳에서 캐릭터 변신을 하고 자신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겪었고 보았다. 진보 혹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처라는 이들이 사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상록수’는 극소수다.
최근 나는 오래된 친구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겪었다.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트럼프 당선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내 대통령은 아니다” “내가 몰랐던 미국…”),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니,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울과 자살이 전 사회적 현상이 된다. 정의로운 사회나 전쟁 때처럼 시비가 뚜렷한 상황에는 자살이 적다. 의문이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은 막무가내 캐릭터다. 트럼프는 한때 자신이 불리해지자 “선거를 취소하고, 내가 이긴 걸로 하자”는 ‘명언’을 남겼다. 이것이 세계 최고(?)의 법치국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한 말이다. ‘인(간)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평가적인 표현이 되기 쉬우니 캐릭터(성격)라고 하자. 뻔뻔함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세 캐릭터다. 돈과 힘을 숭배하고 약자를 짓밟아야만 쾌감을 느끼며 후안무치가 주는 강력한 자아의 느낌을 즐기는 사람들. 미국의 저소득, 저학력 백인 남성들은 이것을 욕망했다.
피의자 우병우씨가 검찰 조사실에서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혈압이 터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누가 더 두꺼운 얼굴을 가졌는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세상. 이것은 앎과 모름의 싸움이다. 뻔뻔함은 ‘악’을 모르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의 법칙이다. 그들은 죄의식과 불편 없이 전진한다. 반면,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사람은 뻔뻔해질 수도 없고, 뻔뻔한 세상을 감당할 수도 없다.
이제 인간의 ‘본질’이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냐,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인간)냐,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냐를 논할 시기는 지난 듯하다. ‘호모 쉐임리스(뻔뻔한 인간)’의 시대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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