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필자가 2000년대 초중반 모 기업연구소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남북협력사업의 예측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자, 연구소는 기존의 북한연구팀을 경제안보팀으로 전환시켰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만큼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명칭이었지만, 남북경제협력보다는 북한발 리스크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선회를 발 빠르게 선언한 셈이었다.
경제안보팀으로 명칭이 바뀐 후 연구의 핵심은 경보(warning) 시스템 개발에 두어졌다. 남북협력 전략은 시나리오 플랜의 하나로만 다루어도 충분했고, 더 중요한 것은 북한발 리스크 관리 체제였다. 그 결과 팀의 연구 방향이 남북관계로부터 글로벌 리스크 관리에 관한 주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의 경제안보는 당시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가 되어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시장의 미래를 낙관하던 당시의 경제안보 논의는 일종의 경보 체제를 마련하자는 보완론일 따름이었다. 불량국가발 리스크관리 따위에나 쓰던 용례라는 뜻이다. 그러나 금융 위기 이후 자유주의 미국의 공공재 공급 능력에 의문이 제기되고, 중국의 일대일로가 비대칭적 네트워크화되면서 경제가 ‘전랑 외교’(戰狼外交)의 수단이 되는 상황이 잦아졌다. 한국의 경우 중국의 사드 보복과 같은 경제 제재에 더해 자유주의 이웃국 일본의 느닷없는 수출규제라는 아픈 경험도 겪게 되었다. 글로벌리즘에 대한 낙관주의는 순진한 믿음이 되었고 경제와 평화의 불협화음에 대한 논의는 신권위주의의 물결과 더불어 탈냉전 30년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패권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소위 디커플링 즉 망분리가 대세가 되면서 이에 대한 대비 체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준비론이 부각되었다. 심지어 논자에 따라서는 장기적으로 양망 체제가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래를 전망하고 이에 대한 주도 능력을 양성하자는 대망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자가 방어적 논리라면 후자는 공세적 논리가 되겠다. 경제안보론이 윤석열 정부 국정의 중심이 되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 같은 경제안보론에 이의를 달 이유는 없다. 다만 20년간 진화해 온 경제안보론의 생태계에 몇가지 준거점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먼저 경제안보론 역시 이론적 계보상 갈등 관리의 해법으로 경제평화론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평화론은 갈등이 경제협력 및 통합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따라서 갈등 해소라는 규범적 측면에서 볼 때 어떤 경우에도 ‘경제’에 안보를 앞세울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평화의 증진과 폭력의 예방’(Pro-Vention of Conflict)이라는 인류사적 과제가 후퇴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안보의 강화는 ‘평화경제’를 창출하는 전방연쇄효과로 이어져야지, 국방 부문이나 갈등 산업을 후방연쇄로 네트워킹하는 구태로 귀결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부시 대통령의 일성이 바로 평화배당금이었다는 것은 경제와 안보의 연계가 안보 비용을 줄이고 평화라는 공공재의 수혜자를 글로벌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 탈냉전의 시대정신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경제안보론이 군사비 증액의 논리로 쓰여 평화배당금은커녕 안보 딜레마의 주역이 되어서는 안 될 말이다.
세 번째는 경제안보를 잘못 다루면 그 자체가 빈곤의 저항을 불러 안보를 불안하게 한다. 따라서 글로벌 남부의 좌절을 부르는 빈곤의 지정학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20세기 공공재 창출의 주역이었던 자유주의 세력이라 해도 그들이 새삼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공공재를 전유할 권리는 없다. 백신 분배 과정에서의 기술민족주의가 백신의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는 역설을 상기하자. 경제안보론이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의 근거였다면 오산이다. 적대와 혐오를 재생산하는 문화적 메커니즘이 경제안보를 호명하고 포획하게 놓아둘 일이 아니다. 자유주의 공공재의 가장 큰 수혜자인 한국 재벌의 3세가 ‘달파멸콩’ 운운하는 것이 경제안보론으로 변호된다면 이 또한 볼썽사납다.
망분리를 통한 양망체제로 가든 망분리의 과정에 대타협이 이루어지든 이미 과도기는 시작된 듯하다. 경제안보론은 이 시기를 헤쳐가는 주요한 전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재난과 위기의 선제적 방지, 지체 없는 위기 지원이라는 평화주의의 축적된 논법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평화주의 생태계를 확인해주고 있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경제를 위한 안보’로 쓰고 ‘안보를 위한 경제’로 읽는 이들에게 고지서를 보낼 때가 되었다. 선거와 축제는 끝났으니 다 같이 미래를 대비하자고.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정치 칼럼 > 정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헌·위법인 법무장관의 인사검증권 (0) | 2022.06.10 |
---|---|
교육감 선거가 끝난 후 (0) | 2022.06.09 |
추방된 자의 귀환 권력과 협치 (0) | 2022.06.07 |
이 두 가지만은 꼭! (0) | 2022.06.03 |
‘제2국무회의’ 열어 지방시대 논하길 (0) | 2022.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