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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겠다고 찾아뵌 첫날
노동자고 월세방에 살며
더더욱 생활을 돌이켜 반성할 마음이 없다 하자
노기 띤 음성으로
음, 돈이 있어야 하네 돈이, 하셨다
그때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내게 돈 이야기 하시지 않았다
자신도 죽을 때까지 방 한칸 없어
셋째딸네 집에서 여섯 달 누웠다 가셨다
가끔 욕창이 난 등 긁어주고
손 다리 주물러드리면 마냥 행복해하셨다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에
봉분 없이 깨끗이 묻히셨다
십수년이 흘러 나는 아직도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
전문 시위꾼으로 집회현장을 쫓아다니지만
가끔 그의 어조로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하곤 한다
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젠 장인어른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송경동(1967~ ) 부분
△ ‘삶과 시’ 하면 그 시는 있어 보이고 ‘일상과 시’ 해도 좀 있을 거 같아 보이는데, ‘생활과 시’ 하면 그 시는 어쩐지 없어 보인다. 혁명이나 투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빨치산 장인어른이나, 전문시위꾼 시인 사위는 생활과 불화한다. 생활 속 돈은 무소불위 권력이다. 김수영 시를 빌려 말하자면, 생활이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 결혼과 월세방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기에, 돈은 딴 데 있고 죽음은 예치지 않은 순간에 오고, 화해에 이르러서도 생활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돈과 죽음 앞에서, 화해라는 이름으로, 생활과 결혼과 월세방이 스스로를 반성할 때까지 우리가 먼저 생활과 결혼과 월세방을 반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먼저 반성하지 않고도 화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는 수단이 목적으로 상승한 가장 완벽한 예가 돈이라 했다. 세상이 ‘신을 위하여’에서 ‘돈을 위하여’로 바뀌었다고 개탄한 이가 있는가 하면, 돈은 모든 것의 축소판이라 규정한 이도 있다. 세상을 지배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결정하는 게 돈이다. 그 돈 앞에서 번번이 오그라들곤 하는 필부필부이기에 “음, 돈이 있어야 하”고, “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 뭐, ‘깨끗한’ 죽음 앞에서야 있거나 없거나 똑같겠지만.
정끝별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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