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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서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오은 (1982~ )
△ 기형도가 ‘오래된 서적’에서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라고 직관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출생이라는 사건 이외에 어떤 질서에 의해 다시 형성된 자아. 그러니까, 이력서에 칸을 채우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나는 나인가 내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서, 그런 근대의 상징 속에 부분이 ‘되기’ 위해서 나의 자랑을 겸손하게 정렬하고 나보다 나의 주변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몇 줄의 거짓말처럼”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될지”도 모르는 나를 중앙을 관장하는 그들에게 최대한 전시하기 위해 우리는 포장하고 몰입한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어떠한가. 당장 내일 문서를 열고나면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이지 않은가. 어떤 부분도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나를 만나는 아침은 또 얼마나 가혹할 것인가.
스스로가 질서가 되지 않는 이상, 이곳의 상징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이전까지 우리에게 오은은 전폭적인 말놀이의 방법론으로 기억되는 시인이었다. 새로 찾아온 오은의 시에서 자신의 질서가 느껴지는 이유는 정치성 때문이다. 시편 곳곳에 세상에 대한 좀 더 다른 인식이 돋보인다. 그런 직관을 나는 ‘미래’라고 부르고 싶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지난 칼럼===== > 경향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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