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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꾼


우리 동네의 사냥꾼은 총도 덫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그는 어느 날 노루를 보았다.

낭떠러지 위, 눈에 홀려 바보처럼 떠돌던 노루를.

그는 온몸을 던져 노루를 껴안고 아래로 굴렀다.

수십길을 깔고 깔리며 바닥에 떨어졌을 때 노루는 그의 몸에 깔려 있었다.

기절한 노루는 한동안 온 동네에 고기 냄새를 풍기게 했지만

알고 보면 노루 동네에서 그가 볼썽사납게 전시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적절히 명예를 지켰으며 아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 성석제(1960~ )




△ 어떤 고백이 탄생하는 순간은 혁명과도 같아서, 단 하나의 고백 때문에 세계가 다시 지어지고 우주의 질서가 스스로의 감격을 따라 재편성되기도 한다. 나는 오늘 여기서 그런 정념을 단순히 사랑에 빠진 상태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를 포기해버린 증상이자 곁에 있는 이에게 손을 내미는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시에서 사냥꾼은 총과 덫 같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낭떠러지에서 이미 죽음을 예고한 노루를 사냥꾼은 제 온몸으로 끌어안고 같이 투신을 해준다. 과연 이런 행위를 사냥이라고 불러야 할까? 구원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는 이 작은 서사를 통해 어떠한 폭력보다도 더 끔찍한 배려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냥꾼은 아마 노루의 목숨을 소유하려 했다기보다는 그 목숨과 함께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폭력을 모르는 사냥꾼은 사냥꾼이라는 존재에서 미달이 될 수밖에 없고, 이곳에는 합당하지 않는 ‘다른 사냥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시가 아직도 고백일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런 고백을 하고 싶고, 이곳의 없는 감격으로 우리의 삶을 권리화하길 바란다. 나와 당신 사이, 혁명이 필요하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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