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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 동화작가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여름방학인데도 보충수업을 하느라 학교에 나와서도 마음은 온통 올림픽에 가 있었다. 바야흐로 1988년. 탁구의 현정화 선수를 비롯해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의 전적을 거둔 한국 선수들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이국 선수들에게 매료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수영의 비욘디는 단연 스타였다. 요즘이야 한 몸매 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흔하고 흔하지만, 그때는 비욘디 같은 몸매를 텔레비전에서 보기 어려웠다.
서울 사람들이 부러웠다. 서울올림픽이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올림픽의 주인공쯤 되는 줄 알았다. 서울은 아니지만 나도 엄연한 한국 사람이니, 주연은 아니어도 조연쯤은 되는 줄 알았다. 아, 대한민국! 정수라의 그 노래마저도 좋았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은 하나인 줄 알았다. 올림픽 때문에 생계 수단인 노점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올림픽을 유치한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도 몰랐다. 훗날, 많은 것을 알게 된 뒤 올림픽이 싫어졌다. 태극 마크를 달고 겨루는 모든 일이 고까웠다.
그런데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마라톤 선수 구오르 마리알. 그는 수단 난민 출신으로 미국 영주권자인데 시민권자가 아니라서 미국 선수로 뛸 수는 없단다. 남은 방법은 원래 국적이던 수단 대표로 출전하는 것. 하지만 마리알은 IOC의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 가족을 죽인 국가를 대표할 수는 없다.” 결국 마리알은 올림픽기를 들고 출전하게 되었다.
2012 런던올림픽 D-30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순수한 스포츠 정신이라고들 한다. ‘순수’라, 참으로 교묘한 말이다. 사전적으로만 따지자면 좋은 의미이지만, 얼마나 수많은 의도로 악용되어 왔는가. 현실을 비판하는 예술을 탄압하기 위해 예술의 순수성을 부르짖고,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내세웠다. 1980년 광주의 대학살을 자행한 바로 그 다음해에 제10회 전국소년체전이 광주에서 개최되었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에 따라.
그런데 간혹 순수하지 않은 선수들이 있다. 축구 선수 지네딘 지단은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극우 성향의 국민전선 후보 르펜이 당선되면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르펜은 인종차별 행보를 보여 온 사람이었고, 알제리 이민자 출신인 지단은 그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이다. 그보다 더 앞선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베트콩도 나를 검둥이라 부르지 않았다.” 또 체코 출신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 테니스 선수 나브라틸로바는 대회에 앞서 기자들에게 미국은 동성애 후진국이라며 부시 행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스페인 축구 FC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전쟁 반대’ 현수막을 경기장에 걸어두고 ‘평화를 위한 바르셀로나’라고 쓰인 유니폼 차림으로 경기를 치렀다.
아! 그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떠올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이번 런던올림픽에 한국의 무하마드 알리가, 나브라틸로바가 나타나 준다면? 한국 축구 대표팀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유니폼에 써붙이고 뛰어준다면. 박태환 선수가 물살을 헤치고 나와 두 주먹 불끈 쥐며 강정마을을 파괴하지 말라고 포효해준다면! 쌍용차 해고노동자 23명을 비롯한 사회적 타살로 인한 죽음들을 위해 애도의 인사를 건네준다면. 이것이 나의 올림픽에 대한 꿈이다.
무슨 망상이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아는가? 언젠가 우리의 무하마드 알리가 정말로 순수한 스포츠의 정신으로 강펀치를 날려줄려는지!
그러지 않는다고 선수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최선의 선택’으로 기억된 군부 독재 이래로 스포츠는 순수를 강요받아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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