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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했던 사립유치원들의 ‘집단 개학연기’ 사태는 하루 만에 끝났다. 정부가 여론과 공권력을 등에 업고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를 몰아붙인 게 주효했다. 싸움의 핵심은 ‘소유권’이었다. 한유총은 일관되게 사립유치원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사적으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토지 사용료와 건물임대료를 정부에서 내야 한다고 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면, 국가 회계관리시스템인 에듀파인을 못 받겠다고 했다. 교육부는 펄쩍 뛰었다. 사립 초·중등학교에도 지불하지 않는 시설사용료를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대신 학교처럼 유치원에도 취득세·재산세 면제 등의 혜택은 준다고 했다. 싸움은 교육부의 한판승으로 마무리됐다.

정부와 사립유치원 간의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한유총은 여전히 사유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에듀파인 가입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교육부가 될 것이다. 한유총이 해체의 위기에 있어서가 아니다. 국민들이 사립유치원을 바로 보게 됐기 때문이다. 사립유치원은 법률상 학교다. 영업이익을 내는 시설이 아니다. 앞으로 돈벌이를 위해 유치원을 짓고 운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가져다준 최대 성과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한국유치원총연합회설립 허가 취소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유치원은 학교다. 유아교육법은 유치원을 ‘유아의 교육을 위하여 설립·운영되는 학교’로 정의한다. 유치원은 교육시설이다.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시설과 구분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관할 정부 부처가 다르다. 그러나 운영에서 두 시설의 차이는 크지 않다. 입학 대상 연령도 6세 미만으로 겹친다. 실제 유치원을 못 간 유아가 어린이집으로 가는 일은 흔하다. 일부 학부모들은 유치원을 어린이집과 같은 탁아시설로 생각한다. 심지어 사립유치원 설립자들조차도 유치원을 학교로 인식하지 않는다. 한유총의 인식이 보여주듯, 그들에게 유치원 운영은 경영이다. 유치원을 학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는 정부의 책임도 없지 않다. 교육부 관리들의 정책 순위에서 유치원은 초·중등학교에 밀린다. 아직 유치원을 교육 주체로 보는 시선은 많지 않다.

유치원의 역사는 1840년 독일 교육가 프뢰벨이 4~6세를 위한 예비학교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킨더가르텐은 ‘어린이 화원’이라는 뜻. 우리는 일본인들이 번역한 ‘유치원(幼稚園)’으로 수용했다. 프뢰벨은 유치원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유아교육론을 정립했다. 이처럼 유럽의 유치원은 시작부터 교육기관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유치원 시설과 함께 유아교육의 철학·내용·과정을 고민했다. 교육 과정과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지만, 유치원이 학교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1940년대 초 유치원을 다녔던 미국인 목사 로버트 풀검은 어른이 돼 자기계발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삶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을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유치원은 인생학교였다.

한국의 유치원 교육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인에 의해 시작됐다. 유치원 교육이 확산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부터다. 이후 유아 원생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교육시설과 교사 양성에 대한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사립유치원은 기하급수로 늘었다. 2004년 1월 유아교육법이 제정되면서 유치원은 법적으로 교육기관이 됐다. 교육 재정, 교원 지위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시설, 교사, 법령 등 하드웨어가 마련되면서 유아 학교로서의 체계를 갖췄다. 그러나 놓친 게 있었다. 유치원 교육에 대한 철학과 밑그림이다. 유아교육이 초등교육과 어떻게 연계되어야 하는지, 유치원 교육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유치원의 정체성이 없으니 교육시설과 보육시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타박할 일은 아니다. 현행 유치원은 영어유치원, 놀이학교 등 유사 유치원과도 차별성이 없다.

유치원은 학교다. 학교는 학교다워야 한다. 유아교육에 대한 철학을 갖고 유치원에 어떤 가치를 담을지 고민해야 한다. 유아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살펴야 한다. 양질의 유아교육을 위해서는 유치원 교사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유아학교’로 바꾸는 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명칭 변경은 일제 잔재 청산을 넘어 유아 교육의 정상화에도 부합한다. 한국 유치원 역사는 100여년을 헤아린다. 역사의 대부분을 유치원의 확충과 관리에 치중했다. 유치원 교육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시설확충이나 투명한 재정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유치원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교육 백년대계의 초석을 놓는 유아 교육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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