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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다시 그 길로 들어선다. 전쟁은 산하를 잿더미로 만들고 가정을 파탄낸다. 그런데도 전쟁은 계속된다. 수많은 전쟁에서 무엇을 배운 것일까.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민주정치가 꽃피고 시민들은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깨우친 때였다. 500만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승리한 뒤 그들은 신에게 감사하고 살아남은 데 고마워했다. 그런데 감사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테네는 자신들이 저주하던 페르시아와 같은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같은 그리스어를 쓰는 헬라인이고 전우였던 스파르타를 적으로 전쟁에 나선다. 이유는 스파르타가 강성해지기 전에 싹을 없애야 한다는 일종의 예방전쟁이었다.

아테네는 승리를 장담하고 삼단노선에 올랐으나 참혹하게 패배했다. 스파르타 연합군에 이리저리 쫓기다 결국에는 목숨을 구걸했지만 스파르타는 칼로 응답했다. 출병한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도륙당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아테네인들은 도주 끝에 앗시나로스강 가에 도달했다. 이 강만 넘으면 살아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테네인들은 살겠다고 강을 건너다 서로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자신의 창에 찔려 죽거나 장비와 함께 강물에 떠내려갔다. 스파르타 연합군은 강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건너오는 족족 도륙했다. 강물은 피로 오염됐지만 이들은 피로 물든 흙탕물을 마셨고 더러는 서로 마시기 위해 싸우기까지 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는 “이긴 자에게는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비할 데 없는 재앙이었다”고 적었다. 스파르타의 승리도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테베와의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해 지배권을 넘겼다. 그리고 이들 헬라인은 결국 자신들이 야만인이라고 말했던 마케도니아에 굴복했다. 헬라인들은 전쟁으로 모두가 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인간이 문명을 시작한 이래 전쟁이 멈춘 시간을 찾기 힘들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원전 3500년부터 20세기까지 1만4500회의 전쟁이 발발했고 35억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평화의 시기는 고작 300년에 불과하다. 한 전투에서 수만명이 한꺼번에 죽은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중세 십자군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출정했지만 도적질과 살인으로 얼룩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사꾼의 농간에 놀아나 막장극으로 치달은 4차 원정 때는 십자군에 의해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초토화됐다. 성전은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도탄에 빠뜨렸다. 또 20세기 들어 양차 세계대전에서 1억~1억2500만명이 전쟁의 제물이 됐다. 특히 인종주의에 의해 600만 유대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한 병사의 기록은 ‘전쟁에 의해 어떻게 인간성이 말살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섯 명의 프랑스 병사가 꽁꽁 언 말 다리 하나를 가지고 개처럼 싸웠다. 병사가 가득 찬 헛간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자 문밖의 병사는 헛간 주위로 몰려들어 몸을 녹일 뿐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아우성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병약한 병사를 집 밖으로 쫓아냈고 혹한으로 이들 중 많은 수가 얼어죽었지만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자신만 생각할 뿐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은 사라졌다.

인간은 전쟁의 명분이 없으면 조작했고, 작다면 크게 만들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애국심, 민족애, 신을 위한 전쟁, 전우애로 포장됐다. 군주가 땅을 위해 싸울 때 인간의 목숨은 하찮은 소모품일 뿐이었다. 전장에서의 죽음은 조국과 신의 대의명분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됐다.

전쟁의 참상은 회의와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전장을 보여주라고 말한다. 그 참혹한 모습을 보고 난 뒤에는 감히 전쟁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하지만 이는 희망사항일 뿐일지 모른다. 문명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극한의 경험>에서 전쟁 경험이 인간과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썼다. 그는 ‘전쟁을 통한 깨우침이 인간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 200년간 전쟁 문화는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노출했지만 전쟁의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구문명 최초의 문학은 전쟁에 관한 서사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트로이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수많은 역사서와 문학이 전쟁을 고발했으나 전쟁은 계속된다. 전쟁은 지구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유효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현실세계에서 여전히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 전쟁 유전자를 가진 인간에게 평화는 일시적인 환상일 뿐일지 모른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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