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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화 논설위원
지난 4일 저녁 서울 안국동 갤러리 아트링크에 배우 박정자(70)의 연극 50년 기념 ‘박정자 전’을 축하하려고 13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였습니다. 한옥을 개조해 만든 갤러리의 아담한 마당에서 최백호의 노래 ‘보고 싶은 얼굴’로 시작된 봄밤의 잔치는 아름답고 따뜻했지요. 1962년 <페드라>의 시녀 역으로 시작한 ‘박정자의 연극 50년’은 한국예술사를 말해주는 시간여행입니다.
늘 푸근한 웃음을 짓던 여배우가 그날처럼 긴장한 표정을 보여준 건 드문 일입니다. 기자가 박정자 선생을 처음 취재한 1988년 이후 그토록 굳은 채 감격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미친 도깨비 같다”는 말로 ‘50년 잔치’의 뜻깊은 첫날을 말합니다. “연극배우로 사는 동안 행복했다. 좋은 작품, 감격적인 무대, 훌륭한 선후배, 그리고 큰 박수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당신, 그 시간들에 대한 감사를 전시라는 이름으로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갤러리 벽에는 진명여고 시절 파란 꿈을 담은 박정자 학생의 똘똘한 눈동자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명동을 거닐던 이화여대생의 다부진 입술까지, 1970년대 추송웅과 출연한 <부부연습>에서 에너지 넘치는 손짓부터 <19 그리고 80>에서 귀여운(?) 80세 할머니로 분장한 순간의 윙크까지 140여편의 연극 출연을 기념하는 생생한 사진들과 동영상, 대본과 의상 등 온통 배우 박정자가 걸어온 ‘길’로 가득했습니다. 오는 13일까지 매일 저녁마다 가수 은희, 배우 강부자, 노래꾼 장사익 등 그의 친구들이 다양한 레퍼토리로 무대를 만들고 한태숙 연출의 ‘맥베스’ 낭독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자 전’의 전시품 중에는 박정자의 다정한 ‘라이벌’ 손숙 전 환경부 장관(68)의 편지도 눈에 띕니다. “사랑하는 형님! 눈물겹고 힘들고 외로운 이 길을 가면서 늘 제 앞에 형님이 등불이 되어주셔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연극은 우리에게 운명이고 종교가 되어버렸네요….” 끝없는 구도의 길을 공감한 글입니다.
연극배우 박정자씨 ㅣ 출처:경향DB
올해 88세인 백성희 선생은 현역배우로 가장 오래 무대를 지켜온 배우입니다. 1943년부터 69년 동안 40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그는 자전극 <길>에서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이 길을 죽을 때까지 가는 거야”라며 가도가도 부족한 예술의 여정을 탐했습니다.
이들은 한 해도 무대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고단한 수행길을 묵묵히 이어온 이들의 온몸에는 수십년 동안 흘린 땀과 눈물이 배어있지요. 비단 배우만은 아닐 겁니다. 예술은 갑자기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문제집을 풀고 몇 시간의 학원 수업 후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는 것처럼 몇 시간, 몇 달 만에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이제 학교현장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해부터 초·중·고교에서 행하는 수업집중이수제로 인해 예술과 체육이 단시간 내에 마스터할 수 있는 과목이 돼 버렸습니다. 이 제도는 학교 재량으로 국·영·수 등 입시와 직결되는 과목의 수업시간을 늘리고, 주당 한두 시간의 수업에 그치는 음악·미술·체육·도덕·사회·과학·가정·기술 등은 3년 동안 배울 내용을 학년별 또는 학기별로 몰아서 교육하는 방식입니다. 특정 학기에 집중적으로 수업하다 보니 국사나 한문 등 자세한 내용을 습득하거나 외워야 하는 과목은 주마간산식의 진도 맞추기에 급급한 게 사실입니다. 학생들의 감성과 인성 발달을 위한 예체능 교육도 체험 위주보다 암기 위주입니다.
얼마 전에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전국 중학교 전학년에 주당 4시간씩 체육을 가르치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졸속 지시가 떨어지자 일부 중학교는 토론·문화·예술·봉사 등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할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줄였습니다. 수업의 효율성을 위한 집중이수제가 전인교육 부재를 낳는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중1·고1 학생들의 경우 기초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중2와 중3 과정, 고2와 고3 과정을 미리 배우다 보니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특히 연간 40여만명에 달하는 전학생의 사정이 딱합니다. 학교마다 학기마다 배우는 과목이 달라 특정 교과목을 배우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해도 속수무책입니다. 또한 입시와 연관되지 않은 교과를 축소하다 보니 수업시간이 줄어든 교사는 다른 학교로 파견수업을 가거나 부전공 과목 연수를 받아 전근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늘어나는 영어와 수학 시간을 위한 기간제 교사나 단기연수 교사의 양산도 우려됩니다.
오죽하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교원단체들이 이 제도를 비판하겠습니까. 정부는 교육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학생들의 지식 발달단계를 정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졸속으로 도입한 수업집중이수제의 문제점 보완과 개선 없이는 교육의 미래도 없습니다. 특히 예체능 교육은 시간의 축적에 따라 숙성되는 자연의 순리와 같습니다. 열 달을 채워 사람이 태어나듯 생각 속의 창고도 한번에 채워질 수 없습니다. 3년 동안 배워야 하는 예술과목을 한두 학기에 끝내면서 어떻게 제2, 제3의 ‘박정자’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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