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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죽음을 정쟁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분간 애도기간을 갖자는 여권 인사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실감, 사회를 짓누르는 슬픔의 공기를 생각하면 조용히 명복을 비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는 민주연구원 부원장이나, 세월호 사태에 빗대려는 일각의 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치유되지 않은 세월호를 정치적 의도로 헤집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난잡한 정치판에도 금도는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찰 녹취록이 사고 3일 만에 공개되면서 국면이 바뀌었다. 녹취록에 따르면 사고 발생 약 4시간 전부터 “난리가 났다”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신고가 11건이나 들어왔지만, 경찰은 추가인력 배치 등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신고자들이 어렴풋하게 사고 위험을 알린 것도 아니다. 11건의 신고에서 ‘압사’라는 단어가 총 13회 등장했다. 이런데도 참사가 빚어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응에 실패한 경찰, 이런 경찰을 지휘하는 정부의 명백한 잘못이고 인재였다. 이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 당초 준비했던 글을 보관함에 넣었다. 

되짚어보니 여권 인사들의 행태는 상식을 벗어났다. 윤 대통령은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끝내 사과하지 않는다. 국정 최고책임자로 국민 생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 ‘송구하다’고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윤 대통령이 뒤늦게 녹취록을 보고받고 불같이 화냈다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뒤늦게 보고받았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윤 대통령이 화낼 일이 아니다. 인재임을 알고도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을 향해 유족과 국민들이 화내야 한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외신기자간담회에서 관련 질문에 농담하고 웃음을 보인 것도 어이가 없다. 국격 추락이며, 죽음에 대한 무례다. 

이해불가 언행들을 나열하면 끝없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소방 인력 배치 부족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하다가 등떠밀려 사과했다. 그는 사고 수습과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이 사람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고,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사건 본질을 은폐하려던 사람이 진상규명을 지휘하는 것은 신뢰성을 훼손시키는 행위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읍참마속을 이야기했는데, 꼬리자르기 하겠다는 건가. 경찰 지휘 책임이 있는 두 사람을 파면하는 것이 사태 수습의 첫걸음이다. 국민의힘은 비겁하다. 지도부는 “추궁이 아니라 애도의 시간”이라며 입을 막으려 하더니, 녹취록 공개 후 경찰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집권여당의 책임감은 어디로 갔나. 

여권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당 관계자는 사건 발생 직후 “우리가 세월호 때처럼 당할 것 같으냐”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결국 탄핵으로 이어진 박근혜 정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대신 ‘이태원 사고 사망자’로 규정하고, 주최자가 없는 행사임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부에 법적 책임이 없음을 은연중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여권은 세월호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사회의 짐처럼 취급했던 박근혜 정부의 행태가 세월호를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로 남게 했다. 윤석열 정부가 여태껏 보여준 책임 회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행태들은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세월호 늪에 빠지지 않겠다며 같은 짓을 반복하다니 딱하다. 국민의 죽음 앞에서 정치적 실익을 따지며 주판알을 튕긴 대가다. 

취임 후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지금이 윤석열 정부 최대 위기일 것이다. 틈만 나면 자유를 외치더니, 그에 따르는 책임은 외면하는 윤석열식 자유방임주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세월호 때 제기됐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던져졌고, 윤석열 정부는 성의있게 답해야 한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최근 KBS 라디오에서 “본인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투철하게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 알면 그렇게 편하게 있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원 참사 이전 발언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 말을 곱씹어야 한다. 이번 참사는 내각이 총사퇴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안이다. 윤 대통령은 진솔하게 사과하고, 전면적 국정쇄신으로 진정성을 입증하라. 어물쩍 넘기려 하다가는 파국에 직면할 것이다.

<이용욱 논설위원 woody@kyunghyang.com>

 

 

연재 | 경향의 눈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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