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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경향의 눈]2인자의 길

opinionX 2017. 9. 7. 10:50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최형우는 리그최고 타자다. 좌타자 최초로 4연속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전인미답의 4연속 시즌 3할-30홈런-100타점에도 도전하고 있다. 프로입단 15년차인 그는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적이 없다. 1인자의 자리에 한번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최형우는 지난달 “영원한 2인자로 남겠다”고 했다. 1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영원한 2인자로 좋은 성적을 올리자고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가 편 ‘2인자론’은 새겨들을 만하다.

2인자는 서럽다. 1인자의 그늘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총애한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걸출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 난 뒤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방탕하고 오만한 모차르트에게 ‘천상(天上)의 음악’을 실현할 수 있는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신은 내게 음악에 대한 열정만 주셨고, 모든 재능은 모차르트의 몫이었다.” 2인자의 설움은 1인자를 향한 적의로 돌변하기도 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도 2인자가 겪는 절망감의 표출일 수도 있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인자는 열등감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30여년간 전두환의 위세에 눌려 지냈던 노태우가 그랬다. 육사 11기 동기였지만 노태우는 전두환의 뒷길만을 좇았다. 전두환에게 인수인계받은 직책만도 육참총장 수석부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민정당 총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5개나 된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헌정을 유린한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5·18 광주학살 때도 전두환이 앞장서고, 노태우가 뒤따랐다.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가졌던 우월감이 있긴 하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과 달리 자신은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당선됐다는 것이다. 노태우는 언론인터뷰에서 “만약 내가 (전두환의) 2인자로 행동했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지난 4월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되려 했던 노태우를 수차례 설득한 끝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그때까지도 노태우는 내 그늘에 가려져 있는 2인자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재벌기업 2인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총수의 방패막이가 돼야 하는 게 재벌기업 2인자의 운명이다.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이 그랬다. 마케팅 전문가인 그는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거쳐 2012년 미래전략실장이 됐다.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이름이 바뀌어온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재용의 가정교사’로 불렸던 그는 총수 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자 수시로 병실을 찾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주도했다. ‘실세 중의 실세’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긴 했지만 실권은 쥐지 못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복심(腹心)’으로 불렸던 소병해 비서실장이나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달리 ‘관리형 2인자’에 그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됐던 최 전 실장은 재판과정에서 ‘1인자 전략’을 썼다. 그는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이 부회장도 “식사를 하든 회의를 하든 제가 한 번도 상석에 앉은 적이 없다”고 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를 ‘이재용 바보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 부회장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고, 모든 책임을 최 전 실장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 전 실장은 재판과정에서 짜놓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진술했다. 그룹 후계자 예우 차원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제공해 이 부회장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미르재단 출연금, 정유라 승마지원 등에 대해선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책임을 묻는다면 판단력이 흐려진 제게 물어 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최 전 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최지성 1인자, 이재용 바보 전략’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1인자만 기억하고 대접하는 세상에서 2인자가 설 땅은 좁다. 2인자가 겪는 비애와 좌절은 1인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거나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 수 있다. 높은 곳은 좁고 위태롭지만, 낮은 곳은 넓고 평안하다. 이런 이치를 아는 2인자는 많지 않다. 안분지족(安分知足), 세상의 모든 2인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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