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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지진으로 흔들리는 나라가 되었다. 건물 외벽이 쏟아져내렸고 아파트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포항의 많은 사람들이 기울어진 아파트의 각도만큼이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조금만 더 흔들렸다면, 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집도 학교도 다시 지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르게 지어야 한다. 한 번 일어난 것은 두 번 일어나고, 작게 일어난 것은 크게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금이 간 마음을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이제 마음도 집을 잃어버렸다. 마음을 다시 지을 수 있을까. 건물은 지진을 반영해서 달리 설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골조를 달리 세울 수 있을까.

육군2작전사령부 예하 50사단 장병들이 17일 오후 포항 청하면 지진 피해지역에서 굴삭기ㆍ덤프 등을 투입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대한 재앙은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리스본 대지진이다. 1755년 11월에 큰 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고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죽었고 85%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당대 사상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세상일을 신의 뜻으로 설명했던 신정론을 강하게 비난했다. “모든 게 ‘신이 만든’ 최선이라 외쳤던 철학자여, 와서 이 폐허를 보라.” “신이 벌을 내렸다고 말하는 자여, 어미의 가슴에 안겨 피흘리고 있는 저 어린것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말해보라.” 그는 신의 섭리에 자신을 내던지느니 약한 인간들과 더불어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겠다고 했다.

근대 계몽주의는 이렇게 태어났다. 자연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은 맹목이며 믿을 것은 인간의 이성뿐이다. 재난을 신의 의지에서 떼어내어 인간 이성의 관리 아래 두는 것. 불확실한 자연을 인간의 과학기술로 지배해 나가는 것. 수잔 니먼의 표현을 빌리면 리스본에서의 깨달음은 “근대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하지만 인간을 믿어도 좋은가. 과연 자연은 맹목이고 인간의 눈은 밝은가. 다시 포항 지진을 보자. 지진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진앙지 근처의 핵발전소들을 보았다. 더 큰 재난을 의식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장 끔찍한 재난이 인간 한테서 올 것임을 알고 있다. 리스본 지진은 근대를 낳은 재앙이지만 지금 우리는 근대가 낳은 재앙과 대면하고 있다.

리스본 지진에서 볼테르는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비난했다. 하지만 10년 전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촨성 대지진은 천재와 인재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댐에 담긴 물이 지반을 뚫고 들어가 단층을 끊어 지진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재해에 인간의 죄가 없는지도 확실치 않다. 볼테르 이후 계몽의 역사는 재난을 막을 수호자가 재난의 유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핵무기와 핵발전소는 이런 역설의 정점에 있다. 최고의 안보수단이 최악의 자기절멸수단이며, 최고의 발전설비가 최악의 황폐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과 주류 언론은 포항 지진이 탈핵 논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필사적이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비합리적 주장을 펴는 것이 광우병 사태와 같다”고 했다. 핵발전소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비합리적 선동과 괴담에 놀아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과 괴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우려는 더 깊은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탈핵론자들이 아니라 “이번 지진으로 원전의 안전성이 입증되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다. 거기서 나는 안전성이 아니라 불감증을 본다. 핵무기가 최고의 방어수단이라고 하지만 핵무기를 끼고 사는 삶이 불안을 유발하듯, 핵발전소가 최고의 안전장치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고 해도 핵발전소를 늘려감으로써만 영위할 수 있는 삶은 불안하다.

원자로를 다섯 겹으로 둘러쌌으니 안전하다는 말은 다섯 겹을 둘러싸야만 안전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장에는 그 다섯 겹이 충분한 것인지, 다섯 겹을 제대로 둘러싸기는 한 것인지 때문에 불안하다(경험상 한국사회에서 이런 불안은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최소 다섯 겹은 둘러싸야 하는 것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놓고, 더 늘리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 그런 맹목성 때문에 불안하다.

2009년에도, 2017년에도 우리를 불안케 한 것은 괴담이 아니라 불감증이다. 이 불안은 괴담으로 생겨난 게 아니므로 과학기술로 해소되지 않는다. 핵발전소에 대한 불안의 해법을 더 안전한 핵발전소의 건설에서 찾는 한 우리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발전소를 양산해온 우리 사회의 길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우리 정신의 골조가 다시 짜일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지진에도 견디도록 내진설계된 정신들, 다섯 겹의 콘크리트로 밀봉된 정신들, 지진이 나면 오히려 핵발전소로 뛰어들어 가라는 저 낡은 볼테르들이 어떤 새로운 계몽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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