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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침팬지 부이(Booee). 그는 1967년에 태어났다. 부이의 엄마는 미국 국립보건원의 실험용 침팬지였다. 거기서 태어난 부이는 잦은 발작 때문에 뇌절제술을 받았다. 예후가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를 가엾게 여긴 의사 한 사람이 몰래 데리고 나와 집에서 3년을 돌보았다. 그러고는 오클라호마에 있는 영장류 연구소로 보냈다. 부이는 거기서 젊은 연구자 로저 파우츠를 만났다. 파우츠는 영장류의 언어습득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다. 부이는 파우츠에게 수화를 배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파우츠는 논문을 쓴 후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연구소는 부이를 뉴욕의 영장류 연구소에 팔아넘겼다. 그런데 이 연구소는 의약품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부이는 여기서 약물 실험 대상으로 13년을 보냈다. 이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던 방송사에서 파우츠에게 연락을 해왔다. 혹시 부이를 만날 생각이 있느냐고. 처음에 파우츠는 미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주저했다고 한다. 연구를 마치고는 볼일 다 본 사람처럼 떠나버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게다가 그런 끔찍한 연구실에 자신을 팔아버린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방송 출연이 부이를 꺼내줄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파우츠는 부이를 찾아갔다.

파우츠는 자신과 부이의 재회 순간을 <가장 가까운 친척>(Next of Kin)이라는 책에 자세히 적었다. “안녕, 부이! 나, 기억해?” 파우츠를 보자 부이는 펄쩍 뛰며 답했다. “부이, 부이, 나, 부이야!”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이것은 파우츠와 부이 둘만의 애칭이었다. 파우츠는 부이를 애칭으로 부를 때 머리를 만지곤 했다. 부이가 뇌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이는 파우츠만이 알고 있던 자신의 애칭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부이 자신이 파우츠에게 부여한 애칭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만진 후 부이는 귓볼을 당겼다. 특색이 있는 귀를 가졌던 파우츠에게 부이 자신이 붙여준 애칭이었다. 파우츠를 보며 부이가 말했다. “그래, 너, 귓볼이잖아.” 이처럼 부이는 파우츠가 까맣게 잊어버린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좁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파우츠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13년을 지옥에서 보낸 부이. 그런데도 그는 나를 용서했고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인간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해주었다.” 파우츠는 실험 때문에 간염을 앓고 있는 부이 앞에서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부이를 연구대상으로서만 다룬 뒤 여느 연구자들처럼 훌쩍 떠난 자신을 책망했다. 다행히 부이의 이야기는 방송을 탔고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덕분에 부이는 비영리 동물대피소로 옮겨진 뒤 거기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스노라 테일러의 책 <짐을 끄는 동물>(Beasts of Burden)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다. 이 책에서 테일러는 동물을 ‘말할 수 없는 존재’ ‘목소리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목소리 없는 존재’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사실 동물들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예컨대 개가 앞발을 그릇 위에 둘 때 그것은 먹을 것을 달라는 말이고, 문을 긁어대며 끙끙대는 것은 나가자는 말이다. 우리가 들으려고만 하면 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고개를 애써 돌려버리는 상황에서는 그것들이 들릴 리가 없다. 우리는 부이처럼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을 때만 깜짝 놀라며 그를 풀어주라고 소리친다. 부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파우츠의 책 제목처럼 그가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척’임을 보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말을 하지는 못하는 존재들은 어떤가. 이제 의약품이나 독극물의 실험대상으로 침팬지를 이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이의 자리는 부이보다 더 ‘먼 친척’인 다른 동물들이 지키고 있다.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 동물들의 처지가 소수자들 일반의 처지와 많이 달라보이지 않는다. 동물들은 언제부턴가 소수자의 형상을 하고 있고, 인간 소수자들 역시 사람취급 받는 것이 쉽지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언어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고, 그 덕분에 그저 소리만 질러대는 동물들과 달리 “정치적 존재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언어를 못하는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의 말은 언어 취급을 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때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자들에게 인문학은 언어를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들이 정치적 존재가 되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듣지 못함’을 상대방의 ‘말하지 못함’으로 교묘히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무능을 상대방의 무능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가 힘주어 강조했듯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존재란 없으며 단지 듣지 못하는 존재, 듣지 않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존재로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그들은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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