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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동네 사는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동네 외곽에 작고 낡은 교회가 있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방치된 채 학대받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정은 더 끔찍했다. 거기 개집은 피자배달통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이었는데 전혀 청소를 하지 않아 분변이 가득했다고 한다. 목줄이 짧아 강아지는 별수 없이 그 분변에 파묻혀 지냈다. 게다가 줄이 조금만 꼬이면 추운 겨울밤을 바깥에서 보내야 했고.

너무 안쓰러웠던 친구는 먹을 것과 핫팩을 넣어주었고, 동사무소를 통해 주인에게 보살핌을 부탁하는 말도 전했다. 친구는 한국의 법도 모르고 한국말에도 부담을 느낀 외국인이었지만 어떻게든 강아지를 살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울먹이며 말했다. 강아지가 죽었다고. 강아지가 보이지 않아 개집에 손을 넣었는데 싸늘한 시신이 있었다고.

그는 내게 교회에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했다. 시신이라도 받아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고. 그런데 교회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고 여러모로 외국인 여성이 혼자 가기는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밤이었다. 날이 밝은 뒤에 가면 어떨까 싶었지만 친구는 강아지 시신을 조금이라도 빨리 받아 장례 치러주고 싶다고 했다. 주인이 평소 강아지를 대하는 것으로 볼 때 시신도 함부로 처리할 것 같다고.

그를 따라 교회 공터에 갔을 때 백구 한 마리가 짖어댔다. 개를 무서워하는 내가 움찔하고 있을 때 친구는 차분하게 피자배달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강아지 시신이 사라졌다며 망연자실해했다. 내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주인이 잘 묻어주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친구가 답했다. 한국에서는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린다고 들었다고. 평소 한국의 반려동물 문화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날 밤 그와 나는 교회 근처의 종량제 봉투들을 뒤졌다.

강아지 시신을 찾지는 못했다. 친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속으로 안도했다. 그럴 리 없다는 내 믿음이 확인된 것 같아서. 그러나 내가 틀렸음을 알려주는 사건이 보도되었다. 천안의 어느 쓰레기 집하장에서 종량제 봉투에 담긴 살아 있는 개가 발견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살아 있는 개를 종량제 봉투에 버린 것에 분노했지만 나는 그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한국에서는 개를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린다는 친구 말이 맞았다는 것을.

현행법령에 따르면 동물 사체는 일반쓰레기라고 한다. 그러니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는 것이 법적으로도 맞고 많이들 그렇게 한다고 한다. 종량제 봉투에 넣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동물병원에서 죽은 경우인데 감염의 위험 때문이다. 죽은 동물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인간 건강에 대한 배려인 것이다. 요컨대 죽은 동물은 그냥 버려도 되는 일반쓰레기와 특별 관리가 필요한 위험쓰레기가 있을 뿐이다.

종량제 봉투에 담긴 생명, 즉 생명 쓰레기는 우리와 동물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생명체, 특히 동물을 산업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농장은 사실상 공장이다. 다만 제품이 살아있는 동물인 것뿐이다. 생산 공정에 대해서는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여기서는 ‘효율’이나 ‘개량’이라는 말에서조차 ‘학살’의 냄새가 난다. 상품은 대부분 먹거리이고 일부가 정서만족을 위한 애완용이다.

그런데 모든 상품의 이면은 쓰레기다. 상품은 가치와 쓸모를 가진 물건인데 생산과정에서 하자가 발견되거나 소비과정에서 소모되면 폐기된다. 해당 상품이 심장을 가진 것이라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소비된 뒤 종량제 봉투에 담겨 집하장으로 가는 것과 생산과정에서 하자가 발견되어 산 채로 집단 매립되는 것은 다른 원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상품관계의 근간에 소유관계가 있다. 근대적 소유권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것은 내 곁에 있어도 소유한 게 아니다. 반대로 처분권만 있다면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조차 소유할 수가 있다. 내가 사물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것을 쓰거나 양도하거나 내다 버릴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다. 쓰고 버리든 내다 버리든 내 맘이다. 그래서 소유권이란 쓰레기에 대한 권리이기도 하다.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했던 프루동의 말을 흉내 내자면 소유란 얼마간의 쓰레기다.

내 친구가 죽어가는 강아지에 더 접근할 수 없었고 죽은 강아지를 데려올 수도 없었던 것은 강아지가 하나님의 공간에 있는 피조물이어서가 아니라 사유재산이었기 때문이다. 강아지에게는 주인이 있었고 주인에게는 처분권이 있었다. 반려견을 산 채로 종량제 봉투에 넣은 부녀는 그래도 사회적 비용을 줄여주는 선택을 했다. 그냥 길에 내다 버린 유기견만 1년에 10만 마리도 넘는다고 하니 말이다.

문제는 동물에게 주인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교회 강아지의 비극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주인을 만난 것에 있고 더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그렇듯, 주인을 만난 것에 있다. 주인을 섬기라는 교회에서 내 친구는 동물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이 아니라 친구라는 걸 보여주었다. 소유하지 않고 돌보는 사람 말이다. 동물을 필요 이상으로, 심지어는 과시적으로 먹어치우는 사회에서 동물과의 우정은 분명 먼 곳에 있다. 그래도 이미 친구, 아니 친구들이 있기에 적어도 길은 있다고 생각한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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