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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고시사회

opinionX 2020. 1. 3. 10:26

공수처법이 통과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진보와 보수가 다시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진보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던 검찰을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고 환영한다. 검찰과 공수처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도의 틀을 마련했다며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감격한다. 반면 보수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개혁을 빌미로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있는 검찰을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킬 거라며 비판한다. 검찰과 경찰이 범죄를 인지한 단계부터 공수처에 보고해야 할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이상인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한다.

언뜻 진보와 보수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둘 다 검찰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검찰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제도다. ‘알지 못하는 타자’까지도 포괄할 수 있게 규칙에 따라 운용해야 한다. ‘서로 잘 아는 우리’만 해당하도록 자의적으로 운용하면 특수한 연대에 복무하는 비시민사회 제도로 추락한다. 진보와 보수는 검찰에 대한 이러한 민주주의 코드를 공유하는데도 왜 공수처법을 두고 죽어라 싸우는 것일까? 그건 경험칙상 검찰이 권력자가 입맛에 따라 자의적으로 운용해온 권력의 도구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검찰로 대표되는 제도에 대한 불신은 매우 높다. 검찰이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 제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라도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 문제다. 몇몇 집단이 검찰을 장악해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민주주의적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주장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제도인 검찰이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언제까지 용납할 수 있겠는가?

제도개혁은 필요하다. 부족한 점이 드러나면 거듭 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제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줄 수는 없다. 제도도 결국 사람이 운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이를 악용해서 그 취지와 어긋나는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의 문화 역량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악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하면 개인이 아무리 문화 역량을 활용해서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검찰이 행사하는 권력의 정당성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기본 전제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를 잘해 고시에 붙어 엘리트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권력 행사의 정당성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고시라는 게 무엇인가? 최근 9개월 공부를 통해 사법시험에 붙었다며 공부법을 알려주는 유튜브가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한 변호사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교 때까지도 게임에 빠져 살다가 단 9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26세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9개월 집중해서 공부하면 붙는 시험을 통해 권력집단의 일원으로 상승할 수 있는 ‘고시 사회’.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악한 습속이 공정한 경쟁으로 찬양받는다. 고시 합격자들이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지배 엘리트가 되어 우리 사회를 과도하게 좌지우지한다. 이들은 정해진 답 빨리 찾기에는 달인인데,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는 젬병이다. 다른 문제를 제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나 마나 한 학위를 따거나 남의 연구를 통째로 베끼며 빈약한 권력의 정당성을 치장하느라 바쁘다.

형식상 사법시험은 폐지되었다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시험용 공부라는 악한 습속에 빠져 있다.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시험에 붙지 못하면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린다. 공부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니 기출문제 풀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단기 속성으로 합격해서 기득권으로 진입하는 공부가 최고다. 이처럼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 계속 지배하는 한 좋은 제도를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공정 운운하며 시험결과를 최우선으로 두는 고시 인간이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문화 역량을 갖췄을 리 없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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