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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한때 국내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동차 브랜드의 새 광고를 보았다. 시리즈의 제목은 ‘2020 성공에 관하여’. 동창회에서 승진을 자랑하고, 어린 아들과 고향 어머니 앞에서 호기를 부리며, 동료 앞에서 당당하게 퇴사하고, 여전한 젊음을 과시하는 내용이다. 대놓고 속물적인 광고였지만, 제법 마음이 흔들렸다.

가격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저렴한 차는 아니지만, 좀 무리하면 장만할 수 있다. 드디어 성공을 손에 쥘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동네에 자가용 가진 이를 손꼽던 시절의 추억과 도로를 가득 메운 고급 차의 행렬이라는 현실 사이의 파열에서 오는 착시다. 그러니 대단한 성공이라며 으스대긴 멋쩍다. 하긴 고급 세단을 모는 공무원을 단속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장관이나 회장 정도 되어야 타던 차다. 그러나 슈퍼카도 심심찮게 보는 요즘이다. 선망의 눈길을 던질 사람은 없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차였는데, 고생 끝에 이제 나도…’라며 눈물을 잠깐 글썽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도 광고에 마음이 동했다. 그렇게 얻고 싶었던 성공을 ‘예상보다 싼값’에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하지 못한 나로서는 마음이 자못 애틋했다.

각 광고는 듀스의 노래를 듣던 1993년의 10대, 퇴사하는 박차장을 바라보는 동료들, 친구의 승진 소식을 확인하는 동창, 부단한 관리로 총각 소리를 듣는 중년 남성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한 성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해당 광고 영상 캡처

조선 시대, 가마는 지체 높은 자만 탈 수 있었다. 특히 쌍가마는 주로 2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에게만 허락되었다. 말 두 마리를 쓰는 가마다. 하지만 금지는 더 간절한 욕망을 불렀다. 조선 후기가 되자 국법을 어기고 쌍가마를 타겠다는 사람이 넘쳐났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이렇게 썼다. “쌍마교는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자가 출생하면 쌍마교 탈 것을 축원하니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은 써야 하겠지만 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럴 것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부녀자가 꼭 소원한다면 마땅히 남의 쌍마교를 빌려 한 역참만 가서 치우면 될 것이다. 하루만 타더라도 태어날 때의 축원을 이룬 셈이니.”

우리 선조도 그러했으니 광고를 보고 가슴 한편이 저릿하다며 자책할 것은 없다. 평생 가마 한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를 누가 함부로 ‘속물’이라며 욕할 수 있을까. 아무리 변변찮은 살림이라도 가마 타고 시집가고 말 타고 장가가던 오랜 풍습이다. 이도저도 못했다면 죽어서 상여라도 탔다. 물론 상여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조상이 부지기수였겠지만, 간절한 소망마저 비웃을 수는 없다. 단선적 상향 욕망의 맹목적 단단함은 팍팍한 삶의 고통 속에서 응결된 것이다.

반상이 철폐되었다. 이제 말 백 필이 끄는 가마도 안될 것이 없다. 단,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계급이 사라진 세상은 역설적으로 박탈감을 부추겼다. 모두가 상향 욕망에 삶 전체를 내맡기며 전력 질주했다. 공식적 계급의 진공 속에 새로운 상징이 대신 들어섰다. 빙글빙글 회전의자 앉으면 ‘사장님’이고, 대출이라도 받아 강남에 등기 치면 상류층이다. 돈으로 족보도 사고, 벼슬도 사고, 몰래몰래 쌍가마도 타던 조상의 후손이다. 이제 맘 놓고 실컷 하라는데, 못하는 놈만 바보다.

하지만 갑오경장 후 벌써 126년이 지났다. 중층 사회에서 진화한 상향 본능이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때가 지난 상징은 결국 힘을 잃는다. 국법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조선 후기의 가마 열풍은 개화와 더불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쌍가마를 소원하는 이가 없듯이 고급 차와 강남 아파트라는 낡은 상징도 조만간 위세가 떨어질 것이다. 

사실 ‘2020 성공에 관하여’는 철지난 성공에 관한 이야기다. 유통기한이 다한 상징을 마지막으로 써먹은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하나의 성공을 향해 전국민 레이스를 펼치던 단선 상향의 시대가 지났다. 2020년 한국인의 성공 기준은 더 다양하고 건강해야 한다. 그래도 영 아쉽다면 다산의 조언대로 하루만 빌려 타는 것은 어떨지.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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