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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고 들판은 풍요로운 한반도의 가을, 지금 이곳에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수십년 동안 전쟁의 위협에 무감각해진 국민들은 사뭇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내면에 불안과 공포가 커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날로 험악해져가는 북·미관계에 속수무책인 정부에 대한 비판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래전 돌아가신 조부께서는 1970~1980년대 남북관계가 악화될 때면 얼른 짐을 싸서 고향 부여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제아무리 참혹한 전쟁이라 해도 재래전을 떠올리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립다. 21세기 첨단 전쟁수단 앞에 시골 고향이라고 해서 서울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결과는 한반도의 초토화고 우리 모두의 공멸이다.

왜 이토록 극단으로만 치닫는 것일까? 핵을 통해서 체제보장을 받고 존속의 길을 모색하려는 북한과 자기들 중심의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을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의 대립이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지난 10년간 경색되어온 남북관계로 대화채널이 완전히 붕괴되어 ‘코리아 패싱’이라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속수무책이 된 것이야말로 사태 악화의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대화의 채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부에 아이들의 목숨과 미래를 맡겨야 하나?

도발, 무력시위, 긴장고조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대화뿐이다. 일방적이고 논쟁적인 선언들이 오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6차 핵실험 이후 미국은 원유공급 중단과 북한노동자 송출금지 등 더 강력한 대북 제재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우리 정부도 이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북한은 더 강한 도발을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사고틀이다. 북한 정권은 ‘미국이 언제 무력으로 북한을 괴멸시킬지 모른다’는 공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이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왔다. 핵이 본질이 아니라 체제보장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은 웬만한 제재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소위 ‘고난의 행군’이 단적인 예이다. 인류역사상 그 정도 극한의 상황에서 붕괴되지 않은 정권은 없었지만, 북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화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초토화의 위험에 처한 한반도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갈등은 서로 다른 집단의 의지와 목표가 충돌할 때 발생한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사고틀을 이해해야 한다. 사고틀을 이해하면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대립되는 당사자 간에 승리와 패배(Win-Lose), 패배와 승리(Lose-Win)의 결과를 예측하고 서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위 두 가지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 패배(Lose-Lose)하거나 양쪽 모두 승리(Win-Win)하는 극단의 시나리오만이 존재한다.

현재의 남북이나, 북·미 상황이 이대로 치닫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Lose-Lose’ 게임이다. 남한도 북한도, 북한도 미국도 패배하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Lose-Lose’ 게임의 참혹한 결과를 예측할 정도의 두뇌가 있는 당사자들이라면 윈-윈(Win-Win)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남한과 북한이, 북한과 미국이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얻는 ‘윈-윈 게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 대화는 실무급이든 정상급이든, 휴전선에서 하든 제3국에서 하든 직접 당사자 간에 면 대 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마주 보고 상호작용을 해야 서로의 의중을 알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 상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엔으로 가기 전에 ‘남·북·미·일·중·러’가 참여하는 2+4 회담을 통해 윈-윈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는 것은 너무 한가한 이야기일까?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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