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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인류에 전한 사람이다. 그의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을 깊이 이해하도록 도왔고,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 안에서 불행하지 않게 살았을까? 애석하게도 수용소 탈출 30년 뒤 그는 자살했다.

찰스 멕베이 함장. 2차대전 필리핀 앞바다에서 군함이 침몰하면서 다수의 부하가 죽고 살아남은 부하 317명과 함께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었다. 다행히 1945년 본국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패배한 전투에 대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23년, 패전의 죄책감으로 그는 자살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문가인 반데어 콜크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 중 살인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병사들을 치료했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한 병사는 전역 후 속죄하기 위해 목사가 되었었다. 결혼과 함께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아기를 살해해야만 한다는 강박적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교전 중 아기를 죽였던 적이 있었다. 결국 그는 이혼했고, 노숙인으로 한참을 지내면서 스스로를 오랜 시간 처벌한 후에야 치료를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도 자살충동을 호소하곤 했었다고 한다.

최근 증평의 모녀 사건, 그들은 자살 유가족이었다. 전쟁, 재난, 극심한 피해 경험이 아니어도,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가 갑자기 자살한 이후 남겨진 가족도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어제 참석한 4·16 추도식에서 우연히 자살 유가족을 만났다. 자신의 연민으로 추도식에 왔고, 죽음에 대한 유혹이 자꾸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전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 남는 것은 힘겨운 삶뿐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복되는 ‘가슴 못 박기’로 인하여 세상 모든 억울한 죽음들은 상처만 계속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고통’은 모르고, ‘사업과 예산’만 아는 정책가, 전문가, 실무자들을 비판했다.

그분은 과거 우리 사회는 살아남은 자들을 돌보지 않기로 한 사회,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 포기한 사회라고 말했다. 깊은 한숨을 지으며, 4·16 가족들의 이후 삶을 걱정했다.

전쟁, 재해, 자살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은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다. 이전의 삶 속에 있었던 규칙, 관습, 신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레베카 솔닛이 재난 현장을 돌면서 펴낸,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는 재난을 경험한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겪었던 체험들이 소개돼있다. 재난을 통한 경험은 단지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삶 속에서 재난을 겪게 되면 뇌의 활동도 달라지고, 삶의 지향성도 달라진다. 재난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안전한 지구는 지진, 해일의 위험으로 가득 찬 지구가 되고, 전쟁 속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을 속이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너무도 끔찍하고 극악한 사회로 다가올 수도 있다. 자살해서 시체로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가 힘들었던 것을 몰랐다. 알고 보니 그가 살았던 세계는 다른 세계였고, 그가 죽은 뒤에야 그의 세계에 내가 와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된다. 위험한 세계에 내가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4월, 5월, 6월 모두 힘겨운 달이다. 이름도 정하지 못한 4·3, 진실도 규명되지 않은 세월호, 아직도 발포자가 없는 5·18민주화운동, 전쟁으로 인해 죽은 수많은 가족들. 억울한 죽음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는 무거운 슬픔과 답 없는 질문들이 애도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죽음 목전에서 돌아온,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왜 내가 생존해 있는지를 자문자답하며, 죄책감과 싸워가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 힘겹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봄은 화려함만큼 혹독한 기억이 찾아오는 시절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자살이 봄에 더 많은 숨겨진 이유는 이 역사적 비극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어렴풋이 든다.

살아남은 자들을 돕는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이고, 방해하는 사람은 망각하는 사람이다. 망각하면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잊힌다. 가해자만 살아남는 사회다. 그런 봄은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란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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