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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소성리 가는 길

opinionX 2017. 9. 20. 10:41

“소성리는 처음 가십니까? 골짜기라예, 산골짜기.”

KTX 김천 구미역에서 나를 태운 택시 기사는 비닐하우스들이 늘어선 좁은 마을 길을 달리며 그렇게 말했다. 참외 수확철이 지나 텅 빈 비닐하우스의 겉면에는 여기저기 붉은 래커로 ‘사드 반대’라고 쓰여 있었다. 

가을하늘이 높고 푸르던 토요일 오후, 동행 하나 없이 숨어들 듯 소성리를 찾아 나선 이유는 내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서였다.

6차 핵실험을 한 지 채 2주일도 안돼 불꽃놀이하듯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쏘아올리는 북한 앞에서, 사드의 전쟁 억지력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 같은 것들은 말 많은 페이스북 담벼락에서조차 뜸해졌다.

사드 발사대 4기가 추가 배치되는 성주군 소성리 마을 입구를 6일 주민들이 농기계로 막고 있다. 연합뉴스

지구 반대쪽에 사는 브라질인 친구가 “탈출 계획이라도 세워 놓았냐”고 걱정스레 보내온 메시지에 “괜찮아, 우린 이런 종류의 불안을 머리 밑에 베고 살아온 지 60년이 넘었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지만,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은 미국 전략자산으로 북한을 공격하는 것은 국제법상 남한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발언(‘미국의 소리(VOA)’ 8월25일 보도)을 공공연히 하는 상황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식으로 마음이 한가롭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드 배치는) 현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입장문을 발표했을 때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 사드는 어느새 설령 그것이 위약효과라 하더라도 나의 불안을 다스려줄 하나의 방패막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드 4기가 소성리에 추가 배치되던 6일 밤부터 7일 아침까지 18시간 동안 400여명의 주민과 반대자들이 8000여명 경찰 병력과 대치하다가 한 사람씩 사지가 들려 나가는 장면을 비춰주는 TV뉴스 화면을 지켜보며 나는 누구의 희생 위에 내가 발을 뻗고 누워 잠을 청하는가를 불편한 마음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성리의 그 밤은 촛불 이후의 강정이었고, 밀양이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택시 기사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며 차를 세웠다. 마을회관 입구를 가설무대 역할을 하는 큰 트럭 한 대가 막고 서 있었다. 트럭을 빙 둘러 돌아가니, 집회가 진행 중이었다.

무대 아래 맨 앞쪽에 앉은 이들은 소성리 주민인 할머니들. 500여명의 참석자들 중에는 세월호의 상징으로 익숙한 노란 리본 곁에 파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평화를 뜻하는 것이라 했다. 집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휴대전화 창에 ‘21일, 미국 뉴욕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이라는 뉴스 속보가 떴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는 소성리 사람들의 절절한 구호가 닿기에 뉴욕은 너무 멀었다. 집회가 끝난 뒤,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에게 안부 인사를 여쭈었다. 사드 배치 당일의 진압 이후 넋이 나가 있었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몸을 추스르고 나왔다고 했다.

“7일 이후로 마을 사람들끼리는 쳐다보기만 하면 울어예. 어떤 할매는 자다가 경찰이 쳐들어오는 꿈에 놀라서 맨발로 마을회관으로 뛰쳐나왔는데, 시간을 보이 새벽 4시더랍니다. 다들 수면제 안 묵고는 잠을 못 자요.”

밤낮없이 사드가 들어오는지, 경찰이 들어오는지 보초 서기에 바쁜 나날을 살다보니 내버려둔 밭에는 잡초가 그득하고, 추수를 해야 할 벼는 시들시들하다. 2년 전만 했어도 추석에 내려올 자식들에게 들려 보낼 밑반찬 만드는 일로 집집이 바빴을 시기인데, 지금은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마을회관 앞에 모여 미사일방어(MD)체계 공부를 한다. 환경영향평가가 없어도, 이들의 삶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는 웃음기 걷힌 그들의 얼굴이 증명한다.

좌든 우든 안보를 위해 사드 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눈 돌리지 말아야 한다. 나의 안녕을 위해 이 순간 대신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여든 두 살 할머니가 새댁 소리를 듣는 작은 마을의 100여명 주민들이 동북아 냉전이라는 태산 같은 짐에 눌려 밤잠조차 편히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서울역에서 KTX로 두 시간이면 닿는 곳. 그곳에 소성리가 있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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