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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과목은 3학년 전공필수였고, 그 선생님의 수업은 타 학과 학생들도 앞다투어 신청하는 명강의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수강신청 마감 30분 전에 남은 과목 아무거나 입력해 넣던 한심한 부류에 속했다. 그러니 학부시절 내내 그분의 강의를 듣지 못했다. 가르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봤을 뿐이다. 학생회선거 유세를 돕기 위해 강의실 바깥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리다 문틈으로 우연히 본 것이다. 비스듬한 어깨로 교탁에 팔을 기대고서 카랑한 목소리로 뭔가 설명하셨는데, 그 모습이 기억에 깊이 남았다. 

나중에 대학원에 진학해서였다. 밤에 행정조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 드니 저편에서 “너희들은 무슨 일을 이렇게 하냐?”는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강의실 배정표가 잘못되어 선생님이 수업하는 교실이 겹쳤던가 보다. “조교실장 당장 올라와보라” 하시는데 이미 귀가한 조교실장이 당장 올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거기엔 나밖에 없었다. 겁을 집어먹고 찾아뵈니 선생님은 그새 화가 풀려 계셨다. “몇 학번이냐? 내 수업은 언제 들었지?” 물으시는데 차마 예전에 수업 한 번도 못 들었다고, 그 이유가 수강신청을 대충해서였다고 밝힐 순 없었다. 그랬다간 다시금 분노가 점화될 것 같아 적당히 수업 들은 시늉을 하였다. 거짓말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몇 주 지나 선생님을 다시 복도에서 마주쳤다. 꾸벅 인사하는 나를 돌려세우시며 “네가 법문학을 공부한다는 그 이소영이구나?” 하셨다. 내 지도교수에게 논문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당신 또한 문학청년이었다며 이런저런 작가의 소설을 읽어봤냐고 물으셨다. 그중 둘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작가였고 다른 한 명은 아예 모르는 이였다. 대답을 못한 채 우물쭈물 서 있으니 언제 한번 연구실로 찾아오라 하셨다. 혹시 아직 공부하지 않은 내용을 물어보셔서 대답을 못하면 어쩌나 두려웠던 나는 선생님 연구실 앞을 지날 때마다 종종걸음을 하였다. 

그로부터 몇 해 더 지나, 그해 마지막 눈이 내리던 어느 초봄,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다.

내가 그분에 대해 가진 기억은 이렇듯 사소한 것들이다. 편찮았던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수많은 기억을 나누어가진 분들의 상실감 앞에서 내게 허락된 애도라곤 고작 “난 또 (동명이인인) 배우 ○○○가 죽었나 했지” 하고 떠들던 철없는 1학년 학생들 뒤통수를 최대한 성난 눈으로 노려보는 정도였다. 세부전공도 다른 데다 아직 학생인 내가 조문을 가면 ‘나대는’ 것으로 보이진 않을까 망설였다. 그러다 발인 전날 밤 문득,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복도에서 뵌 날이 떠올랐다. 그때 해주신 어떤 말씀이 기억났다.

나는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문상 복장도 갖추지 못한 채 대학병원 장례식장을 향해 캄캄한 밤길을 달렸다. 숨이 턱까지 닿아 도착해서야 내가 조문예절을 그때껏 익힌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백합을 손에 쥔 채, 이번에도 한쪽 무릎 세우고 손을 제비처럼 옆에 모으는 그 절을 해버렸다! 실수했음은 문 앞의 선배들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았다. 평소였다면 자책하며 잠 못 잤겠지만 그날은 아무렇지 않았다. 남들 눈에 괴물처럼 보였어도 상관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다행이란 마음뿐이었다. 이젠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때 복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다. “네가 학자로서 어떻게 커 갈지 내가 잘 지켜보고 있다.” 나는 어떻게 커 가고 있을까, 지금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마음이실까, 가끔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럴 때면 지치고 닳은 상태로도 스스로를 지탱하며 걸음을 떼어놓게 된다. 바랐던 만큼의 재능을 갖지는 못했을지언정, 들인 공에 비해 연구 성과가 만족스럽지 않을지언정, 계속 읽고 쓰고 배우며 가르칠 힘을 한 움큼 얻는다. 때로는 과분하게 자신을 잘 봐주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이 우리를 지탱해준다던 지인의 말처럼 말이다.  

어쩌면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신 걸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천상에서 뵈면 꼭 “감사합니다!” 하고 싶다. 그러고서 “가만있자, 누구였더라?” 하시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지.

<이소영 |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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