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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다. 파리 아우스터리츠역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 다시 기차역에서 갈아탄 자동차로 30분을 더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마을이다. 하루에 버스가 세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 마을의 서너 곳 남짓했던 소박한 호텔들은 대개 문을 닫고 이젠 하나만 남았다. 사실 지난봄에도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 격자무늬 창이 있는 객실에서 일주일을 지냈었다. 얼굴만큼 꽃송이가 큰 달리아가 활짝 피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일주일을 묵기로 했다. 이처럼 허름한 호텔에 일주일씩이나 머무는 까닭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을 산책하기 위함이다. 그 마을은 사람 대신 ‘기억하라’는 프랑스어(Souviens-toi)와 영어(Remember) 문구와 ‘침묵(Silence)’이라는 팻말이 낯선 이를 맞이하는 곳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마을의 옛 이름은 ‘오라두르 쉬르 글랑(Oradour-sur-Glane)’이며 토요일이던 1944년 6월10일 오후, 마을을 지나다니던 전차의 기적소리와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멎었고, 성당의 종소리와 대장장이의 망치소리조차 자취를 감췄다. 당시 마을에 살던 이들은 650여명이었으나 그날 대부분의 주민이 죽었다. 살아남은 이는 아이와 여자들이 갇혀 있던 성당에 폭탄이 터지기 직전 3m 높이의 창문에서 뛰어내린 마담 루팡쉬와 남자 다섯 명을 합하여 여섯이 전부이다. 남자들은 로디의 헛간에 갇혔다가 도망쳤는데 그 헛간에서만 60여명의 남자들이 학살당했다. 그 외 어린아이 205명과 여자들을 포함한 나머지 주민들은 앞에 말한 성당이나 농가의 헛간에 갇힌 채 죽임을 당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단 몇 시간 만에 1000년이 넘게 주민들이 살아온 평화로운 마을 하나가 통째 사라지는 터무니없이 잔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주민들을 학살한 이들은 연이어 마을의 그 어느 것도 남겨 놓지 않겠다는 듯이 불을 질렀으며 마을의 그 어느 한곳도 불길이 닿지 않은 곳 없이 깡그리 타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참혹한 학살극을 벌인 이들은 나치친위대 소속의 제2 기갑사단인 ‘다스 라이히(Das Reich)’였다. 그중에서도 기갑사단 기계화 보병연대의 제1대대 지휘관이었던 소령 아돌프 오토 딕만(1914~1944)이 마을에 주둔했던 독일군 중 가장 계급이 높았으며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일을 저지른 3주 후 노르망디에서 전사했지만 그가 남긴 보고서는 더욱 분노를 자아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마을 주민들이 집집마다 폭탄을 감춰 두었는가 하면, 독일군을 자동차에 묶어서 처참하게 죽였고, 마을 우물에는 독일군의 시체가 즐비했으며 레지스탕스들이 성당의 지붕에 폭탄을 감춰 두었다가 마을에 불이 나자 터져서 주민들이 몰살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레지스탕스를 소탕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전후에 거짓임이 밝혀졌다. 

전쟁이 끝나자 샤를 드골 장군(1890~1970)은 오라두르 쉬르 글랑을 순교자의 마을로 지정하여 보존하기로 했으며 그로부터 7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마을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돌로 지은 집은 거뭇하게 그을음이 내려앉고, 씽씽 달려서 왕진을 온 의사의 푸조 자동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못하며 마을을 상징하고 있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 주던 주유기나 건물들도 곧 쓰러질 것만 같다. 전차가 다니던 철로 위로는 애자에 감긴 전선이 어지러이 얽혀 있고 전기도 흐르지 않는 전선을 감고 있는 전봇대가 외롭다, 후에 집집마다 그곳에 살았던 이의 직업이며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붙여 놓았는데 더러 허물어진 집 안에 사진을 남겨 놓은 집도 있다. 어떤 집에는 갓난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사진이 있어 함께 살던 일가족이 몰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양장점과 주점 그리고 마차를 수리하는 이의 작업장과 철공소, 이발소와 미용실, 전차역과 바로 이웃한 우체국, 전차역 앞 전봇대에 매달린 공중전화, 녹슨 철공소와 차량정비소, 성당 앞의 와인바와 호텔 건물까지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마을 모습은 내가 태어난 후 처음 대한 엄청난 풍경이다. 

마을을 둘러보며 누구 하나 얼굴에 웃음기를 띤 사람들이 없다. 큰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다. 모두 처연한 표정으로 망연히 집들과 가재도구나 농기구들을 조심조심 바라보다가 짙은 탄식을 쏟아내거나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을 뿐이다. 나 또한 처음 텅 빈 마을과 맞닥뜨렸을 때 상상을 뛰어넘는 풍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음은 물론 불현듯 솟구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사진기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장면들이 내 속에 새겨졌다. 그것은 현상되지 않은 채 잠상(潛像)으로 남아 있으며, 그 스멀거리는 기억 때문에 오늘 다시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나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이 마을을 찾겠지만 2013년 9월4일에는 특별한 사람이 찾아왔다. 비록 상징적인 신분이기는 하지만 당시 독일의 대통령 요하힘 가우크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을에 들어선 것이다. 피해자들로서는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독일의 다른 정치인들이 나치 수용소와 같은 장소를 방문해 참회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그가 마을에 오자 학살 당시 살아남아 어느덧 89세의 노인이 된 장 마르셀 다트아웃은 “프랑스 대통령은 자주 만났지만 독일 대통령은 언제 오려나 기다렸다. 이야기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사뭇 다르다”는 말로 그를 맞이했다. 

독일은 이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인류의 보편적 사고에 있어 큰 잘못이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해자가 만족하지는 못할 테지만 되풀이하여 참회하며 다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가해자의 본분이다. 그러곤 자신들에게 드리워졌던 그늘을 벗겨내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과거를 보상하려고 노력한다. 인간 일반 누구나 삶을 사는 동안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만 그 잘못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국가라고 해서 다를까. 요즈음의 일본이 더욱 안타까운 까닭이다.

<이지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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