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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두통이 심했다. 어지럼증 같은 거였다. 잘 크고 잘 놀고 잘 지내다가 한 번씩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부모님이 동네 소아과에도 데려가 물어보았는데, 이런저런 질문 몇 개 던지고는 괜찮다, 별 이상 없다, 크느라 그런다고만 했다. 무안한 마음으로 일어나 나오면 또 세상이 한 바퀴 혼자 돌았다. 나 혼자 크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어지럽나. 나는 이렇게 어지러운데 왜 의사는 나를 멀쩡하다고 하나. 혼자 답답해하고 있으면 편들어주듯 코피가 흘렀다.
하루는 동네 교회에 의료 봉사단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료 봉사단이 어떤 건지는 몰랐지만 여러 분야의 의사들이 와서 무료로 진료를 해준다는 말은 알아들었다. 여러 분야라고 하니 머리를 보는 의사도 있겠지. 큰 병원에서 온다고 하니 내 머리를 낫게 해줄지도 몰라. 무료라니 혼자 가도 되겠지. 나는 그들이 온다는 날을 기억했다가 교회로 찾아갔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의사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부모님이 어디 계신가부터 물었다. 혼자 왔다고 하니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보호자도 없이, 저 아픈 거 봐달라고 혼자 찾아온 아홉 살이라니 당돌하고 맹랑해보였을 것이다. 그날 저녁 어디서 들었는지 아버지가 세상에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갔느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타민 한 상자를 내밀었다. 그 비타민도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그 후로 내 어지럼증은 멈추었다. 세상이 도는 게 멈춘 건 아니었고, 더 이상 어지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갔다, 후회도 조금 했는데, 그러나 이제 나는 가끔 그날의 내가 떠오른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신보다 큰 세상으로 누구의 도움도 구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간, 지금도 못하는 일을 해낸 그 꼬맹이를 생각하면 뭉클하기도 하다. 내가 나를 위해 앞으로도 그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겠다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아이의 뒷모습도 눈에 어른거린다. 오늘은 3차 그룹의 등교개학일이고 우리 아이도 그중 한 명이다. 거의 넉 달 만에 가는 학교다.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은 상황이라 이런저런 주의 사항이 많고 복잡하다. 자가진단 설문도 보내고 있고, 학교 내 동선도 복잡하다. 사물함을 이용할 수 없어 교과서도 매번 들고 다녀야 하는데, 개인 방역 관련하여 준비물도 많다. 하지만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하는 것도 편해보이지는 않았다. 혼자 하루 종일 디지털 기기만 마주하는 모습도 보고 있자면 짠했다. 아이들에 대한 돌봄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많아졌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돌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첫 등교 동영상을 보며 울었다. 어느 어른의 손도 잡지 않고, 친구와도 어깨동무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는 그 어린 발걸음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였다.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등교개학을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방역의 차원에서 보면 위험한 선택이고, 교육의 측면에서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그 사이에서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덟 살도, 열아홉 살도 마찬가지다. 교문이 열리든 닫히든 이제의 아이들은 우리와 또 다르게 저 혼자 지켜야 하는 어떤 세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요즘 그 세계가 자꾸 눈에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보호는 기본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닿지 않는 자리에서 제 몫의 삶과 일찍 마주칠 수밖에 없는 코로나19 시대의 아이들에게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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