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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치유의 말들

opinionX 2019. 6. 19. 09:54

먼 곳으로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비행시간만 20시간을 넘는다. 도착지의 계절이 겨울이라, 두꺼운 옷들을 꺼내어 트렁크에 담는다. 노트북컴퓨터와 휴대전화기, 이 기계들을 충전하는 데 필요한 케이블과 충전기, 가져가야 할 자료들…. 꼭 필요한 짐들만 늘어놓았는데도 헝클어진 머릿속이 마룻바닥에 나앉은 것 같다. 

이 와중에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책들이다. 휴대전화기의 상태를 비행모드로 바꾸고 강제적 오프라인 상태로 돌입하는 시간을 위한 것이다. 기내에서 인터넷이 가능한 항공기들이 늘어간다지만 반갑지 않다. 나와 접속하기를 원하는 상대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변명하지 않고도 ‘부재’할 수 있는 이 짧은 시간의 자유를 뺏기고 싶지 않아서다. 

쌓아둔 책들을 한꺼번에 다 읽어치울 것처럼 욕심을 부리지만, 결국 가져갈 수 있는 책은 한두 권이다. 짐을 줄이려고 휴대전화기에 전자책을 다운로드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몇 시간만이라도 모니터에서 눈을 뗀 채 종이로 된 책장을 넘기고 싶다.  

동행할 책 선택의 첫 단계는 주제 분류. 비타협적으로 주저없이, 일이나 전공과 상관없는 책을 고른다. 삶의 틈새에 주어진 시간을 익숙한 것들과 지내고 싶지 않다. 그다음은 무게다. 책의 내용, 완성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어쩌면 그와 반비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무거운 책들은 탈락이다. 그들은 내가 땅에 발붙이고 있는 시간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이 관문마저 통과한 후보군에는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아무 페이지나 열어본다. 흘깃 보는 그 순간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문장이 있어야 한다. 인지신경학자 메리언 울프가 <다시, 책으로>에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를 인용해 말한 것처럼 나는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고 믿는다. 누구와도 접속하지 않을 수 있는 지상 1만미터 상공의 몇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와 아주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폭력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내가 말들의 여백을 곰곰이 헤아리고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누군가와…. 

인터넷 공간과 광장에서 왕왕거리는 사납고 영혼 없는 말들로 하루가 가득 채워져 몸도 정신도 넝마가 된 듯한 밤이면, 나는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꺼내 펼쳤다. <열하일기>로 시작해서, 스피노자의 자취를 따라가는 21세기 뇌과학자의 지적 모험을 좇아가다가, 외계생명체와 인간의 대화를 그린 SF소설에 머무는 식의 방향도, 목적도 없는 독서다. 책이 열어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기갈 들린 듯이 빨려 들어가는 그런 시간이라도 없다면, 지금 이곳의 시궁창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한국인이 가진 말들 중 극히 적은 몇 개의 조악한 단어만이 공격과 혐오와 타자 부정을 위해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되는 시간을 살다보면 인간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싶어진다. 그러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청년시절 “카프카의 <변신>을 다 읽고 났을 때 그 낯선 천국에서 살고 싶다는 거부할 수 없는 조바심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인간의 말들이 이루는 더 높고 어려우나 귀한 세계도 있다. 그런 세계를 엿보다 보면 내가 혹은 우리가 이보다는 나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고, 그렇게 살고 싶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23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다. 퀴어소설을 쓰는 작가가,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고정된 젠더를 벗어나 ‘나’라는 고유한 젠더로 시를 읽는 시인이, 삼시세끼를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 공유하는 세상에서 요리하는 인류를 탐구하는 PD가, 100년을 살아본 노철학자가 무르익은 이야기들을 풀어낼 것이다. 

그 치유의 말들을 놓치는 것이 안타깝지만, 나는 동행할 책과 길을 떠난다. 파일럿으로서 <비행의 발견>이라는 책을 낸 저자는 이 한 문장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날개’라는 말에는 아직도 신의 자취가 남아있다. 어쩌면 날개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날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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