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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혐오의 추억

opinionX 2016. 6. 15. 13:00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의 후폭풍을 보니, 내가 어쩌면 된장녀의 원조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자랄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집은 좀 유별났다. 어머니는 헬리콥터맘, 아버지는 요새 예능프로에 나오는 슈퍼맨의 얼리어답터였다. 덕분에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 티를 줄줄 흘리고 다녔나 보다. 언니가 미국에 사는 덕에, 한국에선 명품이 뭔지도 모를 시대에 나는 언니한테 선물 받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녔다. 명품인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1998년에 독일에서 학위를 끝내고 귀국했을 때, 세상은 외환위기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남편이 곧 취직을 하고 나도 어서 취직해야겠다고 허둥댔으나, 독일에서 전공을 바꾼 탓에 어떻게 해야 취직을 하는 건지 몰라서 좌충우돌할 뿐이었다.

공격의 강도와 양상은 다르지만, 당시에 나도 강남역에서 공격받은 적이 있다. 2호선 안이었다. 승객들이 모두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나만 눈치채지 못했다. 내려 보니 가방 밑이 칼로 길게 그어져 있었다. 당시에는 드물던 샘소나이트였는데, 허름한 모양에 독일에서 싼값 주고 샀던 터라 남의 눈에 띄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히 이름값을 해서 겉면만 잘리고 안은 멀쩡했다. 며칠 후에는 산본의 한 육교에서 어떤 중년 남자가 내 손목을 세게 밀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때도 독일에서 싸게 산 가죽 책가방을 들고 있었다. 모르는 남자들한테 받은 공격은 거기까지고, 나는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점점 질시와 질책의 대상이 되어갔다. 시작은 칭찬과 부러움으로 들렸으나, 결론은 항상 내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시민들이 여성혐오범죄를 사회적 문제임을 표현하고 있다._경향DB


여자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남편도 대학교수가 되었으므로, 나는 모든 걸 가진 여자였고 단지 부족한 것은 아직 아이가 없는 거라고 했다. 이제 양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몸조심을 하며 행복만 즐기면 된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세상에서 나 혼자만 나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불행한 사례들에 대해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건강도 점점 나빠져서 얼굴은 계속 시커멓게 변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승강기를 기다리면서도 불안감을 느꼈고, 가까운 서비스센터에 갈 때조차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대학교 동기인 소설가가 내가 자기를 불러내서 경기도인지 강원도인지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는 그야말로 ‘소설’을 썼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그 소설가의 문상까지 다녀왔다. 남들이 보면 정말 뻔뻔할 정도로 끔찍하게, 유부남인 그 남자를 사랑한 것이었으리라.

그 소설을 찾아 읽고 난 후에 나는 몇 년 동안 집 밖을 나오지 못했다. 소위 히키코모리처럼 살았다. 내가 아는 나와 세상이 아는 내가 너무나 달라서 나는 사람들 눈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된장녀’라는 말은 상대의 어떤 특성을 알려주는 ‘개념’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확인되는 몇몇 요소에 의존하여 상대를 마음대로 규정하는 ‘시선’이다. 당시에 드문 외국 상표 가방을 들고 다닌 나는 ‘된장녀’로 규정되어 공격받은 모양이라고, 이제야 그에 대해 이해해본다. 외환위기로 모두들 장롱 속의 금까지 걷는 판국에, 된장녀는 공격당해도 싸다고 생각되었을지 모르겠다. 또 가장들까지 일자리를 잃고 나앉는 판에 남편 있는 여자가 애 낳는 의무는 제쳐두고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그저 자아실현이라는 호사 취미일 뿐이라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은 내게는 일말의 안심마저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바뀌어서, 젊은이들은 출산 포기로 예측불능의 미래에 대응하고, 여성들은 된장녀와 김치녀의 시선에 공공연히 저항하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과 ‘성역할’의 제도화된 기대가 개인들의 ‘진정성 있는’ 현실 해석보다 우선일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의 방향이 일정치 못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간에 명품은 오히려 ‘시대정신’이 되었고, 내가 당한 ‘이름 붙이지 못했던’ 경험들은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는 ‘여성혐오’로서 오히려 일반적인 경험으로 확대되고 있다.



홍찬숙 | 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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