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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22일 대학 1학년 때 나는 동대문성당에서 열린 ‘김지하 문학의 밤’에 참석했다. 사실 지금은 그 시인은 이름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변절의 나락에 있지만, 당시는 제3세계의 노벨 문학상이라고 하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받을(1975) 정도의 저항 시인으로, 그리고 흰 수의를 입은 그가 포승줄에 묶여있는 흑백사진 속의 모습은 독재에 저항하는 ‘지사’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날 문학의 밤이 끝난 후 그 행사에 참석한 문화예술인, 민주 인사, 학생, 노동자들은 다 함께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외쳤고, 성당 밖에는 경찰병력이 에워싸고 행사를 예의주시했다. 양쪽의 대치상태는 엄청난 긴장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2월 유신헌법 반대 개헌 청원운동 반대가 거세지자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를 발동, 유신헌법에 반대·부정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15년 이하 감옥형에 처했다. 김지하 시인은 그 초유의 국가폭력에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라고 시로써 항거함으로써 7년 세월을 격리 수감되었으며, 이 땅의 민중·민주세력들은 ‘긴조세대(긴급조치 세대)’라고 부를 만큼 숱하게 옥창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 문학의 밤 이후 1년도 안돼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그리고 38년이 지난 오늘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거리에 섰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회의록 조작(삭제) 증거가 제시되었고, 한 언론사가 블랙리스트로 추정되는 9437명의 명단을 밝혀냄으로써 문화예술계가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라는 입장을 천명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항변에 나선 것이다. 회견문에 발표된 ‘박근혜 정부 예술검열, 문화행정 파행 사례 모음’은 가히 박정희 군부 독재시절의 초헌법적 긴급조치의 문화버전으로서 그것이 오늘 이 사회에 버젓이 자행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율스럽다. 따라서 문화예술계는 국가기관의 통제·관리 속에서 침해된 문화예술계의 자율성 회복을 위해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 등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러한 탄압과 전횡으로 문화생태계를 파괴하는 권력 질서가 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사태가 재현되는 역사적 맥락을 통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최순실·우병우·차은택 등 실명과 얽힌 국정의 파행과 권력형 비리는 물론, 사드 정국, 백남기 어르신 사태의 강권, 세월호 사태와 지진 등 재난 대처 부실과 엄폐 등 총체적인 국정 파탄은 현 정권이 자행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참에 문화예술계는 그 칙칙한 억압구조의 민낯을 낱낱이 밝히는 데 본연의 힘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노동의 현실이 갈수록 어렵고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들이 일터를 잃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른바 ‘조선 강국’을 만든 노동자들을 7만명이나 해고한다는 소식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를 떠도는 현실은 안타까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당시 85호 크레인으로 달려가던 ‘희망버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을 가르는 방향타와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절절한 마음으로 거기에 올랐고, 그 뒤로도 많은 희망버스들이 송전탑 등 다른 생명정치의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오는 10월29일 거제 조선소로 희망버스는 다시 연대의 마음들을 모아 떠나고 거기서 함께 ‘고용안정호’라는 희망선박도 제작할 예정이다.
그런데 희망버스든 희망의 배든 모든 희망연대 싸움은 이들 문화예술 일꾼이 수행해 왔다. 따지고 보면 이 사회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현실적 짐들은 이들이 모두 묵묵히 지고 온 것 같다. 세월호 진상규명, 사드 배치 반대, 백남기 어르신 지킴이, 모두 이들 문화예술인이 먼저 나서지 않았나. 그러니 오늘 지난한 싸움 한복판에 선 이들이 자기존엄의 미학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이제 우리가 나서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백원담 | 성공회대 국제문화연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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