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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별별시선

공과 사

opinionX 2016. 10. 28. 14:33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이 유명한 슬로건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나왔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쟁취했던 사회참여의 권리,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참정권 등이 주어졌음에도 왜 여성은 해방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시발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도 얼마든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사회가 사적영역으로 몰아넣은 부분들에서 상존하는 성별위계, 성차별, 성별분업구조가 여성들을 여전히 종속적 위치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마르크시스트도 파시스트도 집에서 설거지를 안 하는 것은 똑같다’는 결론. 그래서 단순히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증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게 강제하는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공사 구분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급진주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슬로건이 다소 극단적인 형태로 실천된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이 그 어떤 검증도 거치지 않은 사인에게 국정 운영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을 맡겨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도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국방이나 외교 같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안들도 모두 ‘최순실’이라는 사람에게 보고되었고, 그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다.

이쯤 되면 앞서 문제가 되었던 ‘서별관회의’는 차라리 권위가 철철 넘쳐흐르는 회의체라고 생각될 판이다. 하다 못해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명백히 ‘공인’들이었으니 말이다. 공사 구분에 실패한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다. 가령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각계를 불문하고 터져 나오고 있는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폭로를 생각해보자. 남성중심사회가 성폭력을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은폐하며, 방조한 결과 이제 한국사회는 성폭력과 그에 대한 묵인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선언이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 중의 핵심이 바로 성폭력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선언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이중으로 씁쓸하게 느껴진다.

권력자들의 사적인 이해·관심과 네트워크들이 온 나라의 공적질서를 교란시켰고, 공적으로 해결되었어야 하는 성폭력은 바로 그 공적 해결 가능성에 대한 뼈저린 학습효과 때문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폭로라는 거친 형식으로 터져 나왔다.

공과 사의 구분이 완벽한 반전상을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부모를 여의고 불쌍하게 살았으니 대통령이 되라고 투표를 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았다고 피해자를 매도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세상인 것이다.

공과 사에 대한 왜곡된 기준을 바로잡는 일은 오늘날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공사 구분법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각 사회가 가진 공과 사에 대한 관념은 그 사회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물이다.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고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이들이 밀리면, 국가와 사회는 몇몇 권력자들의 주머니 속으로 흩어져 사사화(私事化)된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어떤 체계도 모든 것을 보장해줄 순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투쟁하고, 합의하며, 기준을 세우고, 변화시키고, 지켜야 한다. 이 웅성거림과 소란스러움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공의 이익을 저해하는 이들을 향해 다시 외쳐야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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