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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받아가세요!”
혼잡한 광화문역을 겨우 빠져나오자마자 들린 첫 음성이었다. 엄마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준비했다며 사람들에게 초코파이를 하나씩 나눠준다. 나도 받아들었다. 초코파이는 달콤하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친다. 차가 사라진 거리는 이미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많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실제 인파를 확인한 사람들 사이에 묘한 동질감이 흐른다. 줄줄이 서 있던 통신사들의 중계기가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은 터지지 않고 전화도 끊기기 일쑤였지만 불편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인파를 헤치며, 아니 떠밀리듯 이동했다. 집에 가는 지하철 막차 안보다 사람이 더 많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에서 사람에 밀려다니는 경험은 또 처음이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아무도 짜증내거나 화내는 사람이 없다. 묵묵히 사람들이 움직이는 큰 방향을 따라 이동할 뿐.
“많아지면 달라진다”고 했던가. 21세기 들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지난 토요일의 광화문은 여러모로 진풍경이었다. 촛불 없이 팻말만 들고 있던 내게 누군가 불붙인 초를 건네주고, 옆자리 아주머니는 사탕을 한 움큼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가수 이승환씨가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3차 집회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마스크와 모자에 붙인 스티커, 손에 들린 팻말까지 “박근혜는 하야하라”가 선명하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혼자 나온 사람들도 즐겁게 웃으며 인증샷을 찍는 풍경도 자주 보인다. 인기 만점 JTBC 중계차 주위에서는 “힘내세요! 사랑해요!”라는 응원이 들린다. 여기저기서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외침이 터져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통로는 빠르게 채워져 빈곳을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다양한 깃발 사이에서 “아~ 쫌!”이라 써있는 깃발도 눈에 띈다. 외국인에게 일부러 다가가 “위 아 소 앵그리(We are so angry)”라고 설명해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
“힘이 있다고 믿는 곳에 힘이 머무는 법입니다. 힘은 벽의 그림자 같은 것이죠. 그 그림자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작은 남자도 아주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법이죠.”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온 대사다. 지금 청와대에 힘이 있다고 믿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2주 연속 5% 지지율이라는 객관적 숫자만으로도 이미 청와대는 힘을 잃었다.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낼 만큼 거대한 권력인 줄 알았던 청와대와 대통령이 사실 누군가의 줄에 조종당하던 작은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 모두 알아버렸다. 국민은 청와대가 더 이상 힘이 있다고 믿지도 않고, 있다고 믿었던 힘을 계속 줄 생각도 없다. 아무런 자격도 없던 비선 실세가 만들어낸 커다란 그림자는 빛에 노출되면서 걷혔고, 그 그림자에 기대던 권력은 힘을 잃었다. 벽의 그림자가 사라진 거리에서 국민들은 마음껏 떠들며 각자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써가는 중이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다음주와 다다음주에 더 뜨겁게 다시 모이자”는 주최 측의 발언에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빨리 하야하면 그때는 모여서 놀면 되겠네?” 그 재치있는 대답에 예능프로그램에서 김건모가 혼자 술 마시다가 심심해서 아이폰의 인공지능 ‘시리(siri)’에게 말을 걸던 장면이 생각났다. 뭘 물어도 척척 대답하는 ‘시리’에게 말문이 막힌 쉰 살 김건모가 “너 몇 살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리는 명랑하게 받아친다. “먹을 만큼 먹었어요.”
지난 12일, 이승환이 100만 군중 앞에서 부른 “야발라바 하야하라 박근혜” 노래 가사를 들려주면 ‘시리’는 뭐라고 답할까. 미리 테스트해본 결과 내 아이폰의 ‘시리’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했지만 적어도 그날 거리에서 마음으로, 몸으로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 답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리’ 역시 그 답이 뭔지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될 것 같다. 요즘은 인공지능도 그 정도쯤이야 금방 배우는 시대니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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