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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점화에 의한 가스 팽창이 피스톤을 움직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터빈을 돌려 전깃불을 밝힌다. 연료가 계속 공급되고 상류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드는 한 자동차는 움직이고 터빈은 전기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으며 다만 변환될 뿐이라고 말한다. 혹은 폭포 위의 물이 가진 위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화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장백폭포처럼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자갈을 좀 더 아래쪽으로 밀어냈거나 아니면 지축을 흔들면서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의 온도를 높였을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물이 폭포 위로 저절로 올라가지 못하듯이 터빈을 돌리지 못한 에너지도 다시 회수될 수는 없다. 이렇듯 유용한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지 못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낭비되어 흩어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할까? 못할 리 없다. 우리말에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음식물에 들어 있는 화학 에너지를 추출해서 일을 한다. 뛰고 생각하고 신문을 읽는 모든 행위들에 바로 이들 에너지가 사용된다. 우리는 음식물에 포함된 화학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받지 못하면 작동을 멈춰버리는 ‘비평형계’ 생명체일 뿐이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지구와 지구 위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태양 에너지의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밥이나 고기도 결국 태양에서 출발한 에너지가 전기화학적 변환을 거친 결과물에 불과하다. 태양빛이 미치지 않는 심해의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구 내부 에너지를 이용해서 살아가는 소수의 생명체는 물론 예외이다.

이제 우리 입으로 들어온 화학 에너지의 운명을 쫓아가 보자.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밥만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소화기관에서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나가는 10%를 제외한 90%의 밥 대부분은 포도당의 형태로 혈액에 들어온다. 혈액을 전신으로 순환시키는 심장 덕에 포도당은 신체 각 세포에 전달된다. 수십조개에 달하는 인체의 세포들은 포도당을 잘게 쪼개서 에너지를 회수한다. 생물학책에는 포도당 한 개로 38개의 ATP(아데노신 3인산) 분자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 있다. ATP는 생명체의 에너지 통화라 불리는데 우리가 먹은 탄수화물은 ATP 형태로 전환되기 전에는 세포가 일을 수행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하지만 세포들은 실제 30개가 못되는 ATP 분자를 만들 뿐이다.

ATP라는 에너지 통화로 변하지 못한 포도당의 에너지는 세포 내부의 물을 덥히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이나 새들은 자신들이 섭취한 영양소의 상당 부분을 열에너지로 바꾼다. 내연 기관의 온도가 올라 자동차 밖으로 흩어지는 것과 달리 포유동물은 한동안 열을 보존한다. 하지만 그 열은 어디에 보관될까? 생물학 교과서를 보면 우리 몸의 7할은 물이다. 생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여타 물질에 비해 물의 크기는 매우 작다. 따라서 순전히 분자의 숫자로만 따질 때 우리 몸은 거의 대부분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이 가득 찬 풍선과 같은 육신이 내리누르는 중력을 오직 두 발로 서서 평생을 버티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비타민C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의 생화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는 “생명은 고체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이라고 말했다. 물을 제외한 인간의 육신 중 3할은 고체이고 그중 얼추 절반이 단백질이다. 물에 녹는 일부 단백질도 여기서는 의미상 고체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얼베르트 센트죄르지의 말은 “생명은 단백질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으로 각색되고 생명은 “물이 추는 춤”이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물이 추는 춤의 핵심은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성에 있다. 물의 온도가 10도 올라가면 효소 단백질의 활성은 두 배 증가한다. 40도 근처에서 최대 효율을 나타내는 단백질은 그보다 10도 정도 높은 온도에서 계란 흰자처럼 변성된다. 차가운 토굴에서 나와 몸을 따뜻하게 덥히지 못한 도마뱀의 미오신 근육 단백질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파충류의 혈액, 즉 물도 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다. 변온동물인 이들 도마뱀은 태양을 향해 기꺼이 몸을 맡겨 체온을 높인 후에야 비로소 먹을 것을 찾아 나설 수 있다. 파충류들도 분명 물을 덥히겠지만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의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고 밤이 되면 기꺼이 체온을 떨어뜨린다. 반면 닭이 부산스레 모이를 쪼고 염소가 잠을 줄여가며 열 시간 넘게 풀을 씹는 이유는 바로 이들 몸을 구성하는 7할의 액체를 밤낮으로 데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아밀라아제와 셀룰라아제 효소가 전분이나 셀룰로오스를 효과적으로 분해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있다. 정온성을 확보한 동물들은 털로 몸을 치장한 뒤 온대지방을 지나 극지방까지 생활터전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극지방 가까운 곳에서 뱀에게 물리는 사건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인간을 필두로 하는 포유동물은 양서류나 파충류 등의 변온성 동물에 비해 꽤나 사치스러운 삶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사치스러움은 정온성에서 극치를 선보인다. 체온만큼 기온이 상승하는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틀어대며 자신의 환경을 10도 이상 낮추면서도 제 몸의 체온을 37도로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은 계란이 열 개나 들어간 계란말이를 거침없이 먹는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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