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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지난주 수요일에는 학생들과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을 읽고 토론을 진행했다. 잘 알다시피 최인훈의 <광장>은 철학과 대학생인 이명준이 남한과 북한을 경험하고 마침내 제3국행을 선택했다가 결국 자살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주제 발표를 맡았던 학생에게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상징이 ‘광장’과 ‘밀실’인데 어째서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밀실과 광장’이나 ‘광장과 밀실’로 하지 않고, ‘광장’이라고 했을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을까?

최인훈의 <광장>이 이전의 분단소설과 구분되는 점은 근대적 교양을 지닌 개인(이명준)의 출현에 있다. 우리 분단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남과 북이라는 이념의 민감성, 이데올로기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분단 문제에 접근하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이명준이란 이념과 민족을 넘어선 보편적 개인, 자기결정을 통한 개인성의 구현이란 근대적 교양을 지닌 주체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은 단순히 남북한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밀실)’이 ‘전체(광장)’의 일부로서 사회적 통합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이명준은 그 같은 광장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지만, 작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밀실(正)’과 ‘광장(反)’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合)’의 창출이란 변증법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되묻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광장과 밀실’이 아니라 ‘광장’이다.

19대 대선 투표일 전날인 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펼쳐진 서울 광화문광장에 지지자들이 모여 휴대폰 불빛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다. 권호욱 기자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1년 전 이맘때만 하더라도 우리들 가운데 5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 탄핵부터 5월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까지 이 모든 것은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의 치열한 투쟁 덕분이었다. 2016년 10월29일을 시작으로 2017년 4월29일까지 23주 동안 주말마다 수많은 개인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전국에서 160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역사에서 많은 인원이 일시에 거리로 나선 것은 몇 차례 있었지만, 이토록 끈질기게 오래도록 광장에 모인 적은 없었다. 가을에 시작해 혹한의 추위를 참고 견디며 봄이 오기를 갈망했던 시민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우리 시민사회의 성숙과 정치의식의 발전을 상징한다.

그러나 광장이 끝나면 다시 밀실이 열리는 법이다.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선거 앞에서 시민들은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갈라졌다. 민주당 지지자는 물론 당직자까지 나서 심상정 지지는 ‘죽는 표’라며 사표론을 제기했고, 진보정당 지지자를 ‘정치홍대병자’라 비판했다. 반대로 문재인 지지자에게는 ‘문빠’라느니 ‘문슬람’이란 비하가 쏟아졌다. 서로가 서로를 비방했고, 혐오했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소셜미디어에서는 대구·경북지역, 특히 사드 배치 지역인 성주를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혐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타인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친목도모 행위가 되었다.

마치 “당신 1980년대에 뭐했어?”라는 말처럼 곳곳에서 ‘촛불’이 자신들만의 것인 양 호명되었다. 비록 선거에서 서로 다른 후보와 정당을 지지했더라도, 개인은 다양한 정치적 의지와 정체성을 가지기 마련인데, 지지자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 호명되었다. 독선과 막말로 상대를 제압하려 드는 가운데 정치가 쓸모없이 낭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번 대선과 촛불광장이 우리 사회 관계성 회복의 희망 또는 징후라 여긴다. 다시 말해 어차피 1년 후면 끝날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물러나라고 외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광장에 나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립된 밀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을 회복하고, 확인하고 싶었기에 모두 광장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최인훈은 <광장>의 서문에서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사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도 빛나는 오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보람을 만들어 나가자.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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