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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광주다움

opinionX 2020. 3. 6. 10:42

친구의 친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외국에 사는 친구인데 가족 행사가 있어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감염이 됐다. 친구가 걱정된다며 보내준 링크에는 차분히 적은 병상일지가 있었다. 평소 건강했는데 가벼운 인후통과 마른기침을 느끼자마자 자가격리를 하고 바로 전화해 검사를 받는 등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게 대응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지의 일부를 칼럼에 쓰고 싶어 연락을 했다. 정중한 사양의 답을 들었다. 감사와 희망이 담긴 글이었고 나 역시 일상의 소중함을 적은 부분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인용하고 싶었는데 거절의 의사가 단호했다. 응원의 메시지도 많았지만 글을 올린 후 온갖 비방을 들었다고 했다. 글을 왜 올렸느냐, 신천지냐, 탄핵에 찬성하느냐, 중국 거쳐 왔느냐… 이런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알려지고 나면 자신과 가족이 받을 2차 가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듣고 보니 단호한 거절이 이해가 갔다. 동시에 화도 났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도리이듯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낫기를 기원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어디를 거쳤든, 무슨 종교를 믿든, 어디에 살든 당장 아픈 이를 추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만약 그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되면 감염되는 것이 마땅하기라도 하다는 건가? 공동체의 불행을 함께 이겨낼 궁리보다는 위기를 빌미로 남을 공격하고, 궁지에 몰아 희열을 느끼고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위기 때 본모습이 나온다고 했는데 오히려 신난 듯이 보이는 이들도 있는 건 착각일까.

시계가 진짜니 가짜니, 마스크 공급이 풀리네 마네, 사과를 하라 마라 갑론을박 트래픽의 급증으로 바빠진 뉴스 사이트와는 달리 나를 포함해 많은 이의 삶이 단순해졌다. 퇴근 후 약속해 친구를 만나고, 사람 많은 거리를 걷고, 맛집에 줄을 서고, 장난치며 손을 잡고, 깔깔대며 이야기하다 침이라도 튀면 면박을 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새삼스럽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기침을 하자 옆자리 사람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보는 이가 다 무안할 정도였지만 일어서는 사람도 이해가 간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눈만 빼꼼하니 중동 어느 나라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려고 보니 품절인 항목이 유난히 많다. 음울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이 됐다. 이런 날이 이렇게 갑자기 닥칠 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이토록 쉽게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이 와중에 밖에 안 나갔더니 통장에 돈이 쌓였다며 코로나19가 물러가면 매일 세끼 외식을 하겠다고 자영업자들 각오하라는 이가 있지를 않나, 질병관리본부에 자양강장제를 보냈다는 이도 있고, 배송기사를 위해 문고리에 포장도 안 뜯은 마스크를 걸어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비난하고 사재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무료 급식소가 폐쇄되자 도시락을 전달하고, 동네 그룹홈과 쉼터에 익명으로 간편식을 배송하는 이도 있다. 대구에 병상이 부족해 입원을 기다리다 쓰러지는 상황이 늘자 광주에서 경증환자를 이송해 치료를 시작했다.

광주시 발표자료는 무척 비장했는데 마음에 닿는 문구가 있었다. “1980년 5월, 고립되었던 광주가 결코 외롭지 않았던 것은 광주와 뜻을 함께해준 수많은 연대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경계하고 밀어내기보다 더욱 긴밀한 연대를 통해 국민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이것이 지난 100년간 이어온 3·1 독립운동의 정신이며, 40주년을 맞이하는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이자 “광주다움”이라고 했다. 서울서 나고 자랐지만 ‘광주다움’을 좀 장착해야겠다.

암울한 재난 영화가 따뜻한 휴먼 드라마로 변하는 순간 바이러스는 사그라든다. 영화 보면 다 그렇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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