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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대규모의 의학

opinionX 2020. 3. 3. 10:20

“우리는 병리학자, 인류학자, 위생학자, 진보주의자 이렇게 네 명의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 1902년 루돌프 피르호 사망 당시, 한 독일 신문의 부고기사다. 의대 교과서에는 병리학의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한때는 심지어 ‘의학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저명한 의사였다. 또한 인류학의 창시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독일인류학회를 창립했는데,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 프란츠 보아스가 그의 제자다.

어린 시절 피르호는 영특했지만, 의과대학에 갈 학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의대에 진학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무상으로 가르쳐주었는데, 대신 군의관으로 의무복무해야 했다. 훔볼트 대학교의 전신이다. 의대생이 된 피르호는 학문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의사면허를 취득한 피르호는 베를린대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도유망한 27세의 의사, 피르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실레지아 지방에 발진티푸스가 크게 유행한 것이다. 프로이센 정부는 실태 조사를 위해 그를 파견했다.

새내기 의사였에 불과했던 피르호는 사실 전염병에 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주민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위생 시설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군주는 이들의 고통에 무심했다. 전염병이 돌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피르호는 300쪽에 이르는 발칙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전면적인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세금을 면제하고, 도로를 개선하고, 고아원을 설치하고, 구호기금을 만들라.’ 

물론 프로이센 정부는 보고서를 채택할 생각이 없었다. 보고서를 제출한 지 8일 만에 피르호는 3월 혁명에 동참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바라던 혁명은, 그러나 실패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시골에 좌천된 그는 두문불출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획기적 발견을 거듭했다. 약 10년의 ‘유배’를 마치고 베를린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인류학자로도 활약했다. 코카서스, 이집트, 수단 등에서 인류학 현지 조사에 나섰고, 트로이 유적의 발굴에 참여했다. 수백만명의 독일인에 대한 인류학 연구를 통해 ‘독일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더 큰 규모’에서 빛을 발했다. 바로 정치였다. 베를린 시의원과 독일의회 의원을 장기간 역임하면서 젊은 시절 보고서에 썼던 꿈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공공보건 제도를 만들고, 식품위생법, 상하수도 개선 등 거대한 사회개혁에 나섰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교육과 번영이 세상을 위한 처방이라고 믿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대구와 경북 지역으로 벌써 수백명의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이 파견되었다. 피르호처럼 갓 의사 면허 혹은 전문의 자격을 받은 젊은 의사들이다. 국립의료원의 내과 의료진,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정신과 의사와 간호사도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다. 민간 자원도 줄을 잇는다. 그들의 눈에 과연 무엇이 보일까? 아마 실레지아에 파견된 피르호의 눈에 비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 명의 비전문가가 백 가지 처방을 부르짖는 시국이다. 혐오가 대책이고, 차별이 예방이고, 배제가 방역이란다. 인류사를 통해 무수히 반복되었지만, 별로 성공한 적이 없는 전략이다. 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일선의 공무원과 의료진이 안타깝다. 사태가 진정되면, 구석기 시대의 처방에 따르지 않은 이유를 힘겹게 소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혐오로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면 나부터 앞장서겠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에서 유행한 전염병만 60여건. 지속 불가능한 원시적 전략이다. 

피르호는 이렇게 말했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의 의학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이론적 해결책을, 정치와 인류학은 실제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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