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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에는 광장이 있다. 천안문광장, 트라팔가광장, 카탈루냐광장, 바츨라프광장 등. 광장은 각자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다. 그리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광장들은 혁명의 유산을 갖고 있다. 1919년 5·4운동과 1989년 6·4항쟁의 중심지였던 천안문광장, 스페인 왕정으로부터 카탈루냐 분리 독립의 시민 함성이 가득했던 카탈루냐광장, ‘프라하의 봄’으로 각인된 체코 민중혁명의 진원지 바츨라프광장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우리에게도 광화문광장이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분노의 촛불을 들고 겨울의 길고 긴 암흑의 시간을 뚫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전진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의 함성에서 2015년 촛불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광화문광장은 시민들의 정치적, 문화적 해방구였다. 그러나 혁명과 문화가 지배한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일상 속 광화문광장은 우리에게 여전히 불편하고 재미없고 권위적이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서울시가 촛불시민혁명의 희망을 담아 새로운 광화문의 시대를 열겠다며, 광장 조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광화문시민위원회가 제시한 밑그림은 광화문 주변을 역사광장으로 조성하고 훼손된 월대, 해치상, 동십자각, 서집자각, 의정부터를 복원하는 것과 세종문화회관 쪽 차도를 없애 시민광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둘러서도 안되고, 너무 느긋해서도 안된다. 정치적 이해타산에 매몰되어서도 안된다. 충분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목적과 가치가 훼손될 정도의 타협도 안된다. 동상과 꽃밭이 지배하지 않는,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광장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청사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리가 중요하다.   

첫째는 역사유산의 원리이다. 주지하듯이 광화문 일대는 조선시대 왕이 살았던 권력의 중심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신을 훼손하기 위한 상징적 파괴의 공간이었다.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훼손된 유산들은 제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다만 복원의 원칙은 문화유산의 원형 복원을 위한 물리적, 조형적 디자인이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가치의 귀환과 동시대 공간과의 조화이다. 복원으로서 광화문광장은 기념물이 아니라 기록물이 되어야 한다. 복원될 것은 권력의 역사적 아이콘이 아니라 역사의 문화유산적 가치이다.

둘째, 시민공간의 원리이다. 광화문광장의 주인은 권력자나 통치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시민들이 광장에 편하게 접근해야 하고, 즐겁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더 좋겠다. 광장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정치적 요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만 차별과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 장소로 시민의 공간은 용납될 수 없다. 광화문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의 행동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평화롭고, 자율적이며, 호혜적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공간으로서 광화문은 아고라이면서도 아레나이다. 광화문광장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집결지이며,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들의 차이가 서로 인정되는 놀이와 유희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일상문화의 원리이다. 광화문광장 조성의 핵심적인 철학은 비움이다. 광장의 비움은 새로운 채움을 예비한다. 비움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광장의 조성은 최소한의 조경과 시설 보완에 그쳐야 한다. 다만 그 비움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지금 광화문광장은 주말마다 대형 이벤트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거대한 무대를 쌓고 사운드 테스트를 위해 높은 레벨의 음향 출력이 귀를 강하게 자극한다. 광장의 몽골텐트는 주변의 확 트인 경관을 해친다. 대형무대와 거대 음향시설과 몽골텐트는 그냥 일상의 경관이 되어버렸다. 광화문광장이 일상문화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대형시설이 들어서는 행사를 불허하거나 최소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광장의 피로는 바로 이벤트 때문이다. 대형 이벤트 대신 시민들이 광장을 거닐거나 앉아서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확성하지 않은 노래와 연주와 퍼포먼스가 이곳저곳에서 생겨나 일상의 카니발로 이어질 때, 비로소 광화문광장은 모두의 광장이 될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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