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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한 국물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온갖 국물 음식이 오른다. 안 보이면 섭섭하다.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끼니마다 와인·맥주·탄산수를 곁들이고, 중국과 인도, 서남아시아며 아프리카 곳곳의 사람들이 끼니마다 차 없이는 못 산다면, 한국인에게는 국탕·찌개·전골이 있다. 저들의 주식인 빵·찐빵·난이란 덤덤하기 이를 데 없다. 탕면 빼고는, 국수는 뻑뻑하다. 맹물만으로 부족한 저작(咀嚼)과 목넘김을 돕느라, 시거나 달거나 쌉쌀하거나 특유의 풍미를 띤 와인·맥주·탄산수 또는 차를 마실 수밖에 없다. 나란히, 한국인에게는 짠맛 위에 복합적이면서 풍성한 풍미를 세운 국물이 고맙다.

국물 음식 덕분에 덤덤한 맨밥이 편안하고 맛있게 넘어간다. 국물은 쌀 등 곡물의 전분이 호화하면서 이룬 맨밥의 맛과 향을 증폭한다. 지나치게 얌전해 잘 나서지 않는 맨밥의 단맛과 구수함, 그리고 미량의 지질에서 유래한 기름진 고소함이 국물과 함께 새로이 몸을 드러낸다. 장·젓갈·김치의 증폭과는 또 다른 질감과 촉감이다. 하지만 익숙한 사물이란 낯선 사물일 수 있다. 한국인은 내가 먹는 국탕·찌개·전골의 정체와 속성을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가령 국탕이란? ‘찌개에 견주어’ 물을 많이 잡아 끓인 음식이다. 그리고 주재료의 풍미가 앞선다. 콩나물국, 미역국, 설렁탕, 대구탕 등이 좋은 예다. 말만 들어도 콩나물, 미역, 소고기, 대구의 풍미가 삼삼하다. 찌개는? ‘국에 견주어’ 바특하게 끓인다. 그리고 찌개 속에서는 채소든 고기든 해산물이든 모두 푹 무른다. 푹 무른 대로 장 또는 양념의 풍미가 깊숙이 침투한다. 된장찌개를 기본으로, 김치찌개라든지 부대찌개는 이러한 속성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전골은? 국탕·찌개 동아리와 그 속성을 공유하되 계통과 자질이 다르다. 냄비에 가득 끓여 나온, 모든 재료가 푹 익어버린 국물 음식은 이름만 ‘전골’일 뿐 전골일 수 없다. 우리는 전골 본래의 의미와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전골은 잘 손질해 얌전히 간추린 고기, 채소, 해물 등을 전골 전용 조리 용구인 전골틀에 맵시 있게 담은 뒤 장국 또는 간을 맞춘 옅은 육수를 부어, 즉석에서 끓이면서 먹는다. 예전엔 곁상에 따로 전골틀을 올려 차리기도 했다.

전골은 휴대와 이동이 간편한 노구솥과 손을 잡고 태동했다. 노구솥은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는 명확히 전골 전용의 용기, 곧 ‘전골틀’이 되었다. 이런 내력을 거쳐 전골은 국탕·찌개와는 구분되는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 조선 말기를 지나면서는 바로 익는 재료,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리는 재료 등을 미리 손질해 전골냄비(노구솥 또는 전골틀에서 진화했거나 냄비에서 전용한)에 보기 좋게 담고, 장국을 부어 즉석에서 끓여 재료가 먹기 좋을 때 바로 건져 먹을 수 있는 국물 요리로 자리를 잡았다. 식민지시기의 인기 요리인 조자호(趙慈鎬, 1912~1976)의 생각에 전골이 호화로워질대로 호화로워지면 곧 ‘신선로’였다. 요컨대 전골이란 즉석 국물 음식이자 전용 용기의 연출을 전제로 한 일품요리였다. 연출에서는 격식과 모양을 뽐내고, 여기에 붓는 장국 또는 육수는 맑아야 한다. 푹 익히지 않은 다양한 부재료는, 국탕 속의 그것과 달리 조직감과 색감과 모양을 유지해야 한다. 육수는 그때그때 더해 끓여 탁하지도 바특하지도 않도록 했다.

여기까지 쓰는 동안 ‘본래’ 같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전골의 정체와 속성을 곰곰이 생각지 않고 전골 운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물 음식의 분야, 국물 음식에 대한 또 다른 ‘상상력’이 아쉬워 ‘본래’ 운운한다. 국물에 잠긴 재료의 상태, 국물의 탁도와 점도에 대한 새로운 접근, 장국 및 육수의 섬세한 운용, 일품요리 연출의 가능성 등에서 전골은 의미 있는 자질을 쥐고 있다. 갱신과 새로운 탄생의 여지가 있다. 그저 넓고 깊은 냄비에다 푹 끓인 국물 음식과 분명히 구분되는 전골의 본래 모습을 이 계절에 돌아본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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