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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국탕

opinionX 2018. 10. 18. 11:00

따끈한 국 한 사발이 간절한 계절이다. 국자, 탕자 돌림 음식과 한국인의 식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더구나 쌀쌀해지는 데에야. 세상에 자식을 낸 모든 어머니와 세상에 온 모든 아들딸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미역국, 일상생활의 푸근한 벗 콩나물국, 젖산 발효의 미덕을 쥐고 따듯함을 더한 김칫국, 농민과 노동자의 한여름을 위로한 추어탕, 국물 내기의 기본기를 환기하는 곰탕과 설렁탕, 바닷바람과 바다의 날빛을 아우른 북엇국, 해안 주민의 오랜 친구인 김국과 매생이국, 채소와 고기가 손잡은 미각이 한 사발 비우는 내내 상승하는 소고기뭇국과 육개장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은 드물리라. 이쯤만 나열하고도 미안하다. 이루 다 손꼽기 어려운 채소, 나물, 고기, 수산물이 다 국탕으로 변한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갈마듦도 다채롭다.

국탕이 제대로 되려면 국물을 제대로 내야 한다. 그리고 ‘간’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간의 출발은 소금의 짠맛이다. 소금, 한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조미료이다. 어떤 재료든 재료가 쥔 원물의 맛을 사람이 충분히 감각하도록 증폭해주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막 뱉은 말이 아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20대에 쓴 산문 <민옹전(閔翁傳)>에서 소금은 맛 자체를 나게 하니, 소금이 없이는 맛도 없고(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소금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것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다시 소금에다 만주 원산의 콩을 더해, 단순한 짠맛을 더 맛난 맛으로 발전시켰다.

한나라 때의 일상 기록인 <풍속통의(風俗通義)>는 이렇게 썼다. “장(醬)은 소금으로 만들지만 그 짜기가 소금보다 더하다(醬成於鹽, 而鹹於鹽)”라고. 속뜻은 장은 소금의 짠맛보다 한층 증폭된 맛난 짠맛을 낸다는 뜻이다. 아득한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고기에 소금을 더해 발효시킨 육장(肉醬)을 가지고 장(醬)을 만들었다. 그 장으로 단순한 짠맛에 동물성 단백질의 풍미를 더해서 한층 만난 짠맛을 얻었다. 

고기뿐인가. 어류를 이용해서도 젓갈을 얻었다.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은 그 원형을 잘 보여주는데, 이런 계통은 ‘해(해)’라고 불렀다. 그러다 콩 또는 콩으로 쑨 메주에 소금을 더한 두장(豆醬)을 담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고기와 생선의 동물성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해(해)’로, 콩 단백질을 이용한 계통은 ‘장(醬)’으로 구분하는 데 이른다.

동물의 살코기와 내장과 뼈를, 생선이라면 살 및 대가리와 뼈의 인지질을 뽀얗게 우려낸 ‘곰’은 소금간만 해서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고기, 생선 등의 동물성 단백질이 내는 감칠맛 또는 채소의 풍미를 ‘소금보다 맛있게 짠’ 간장으로 증폭시키려는 시도는 장을 점점 더 맛나게 담그면서 끝없이 발전했다. 

맑은장국이 그 예다. 장으로 간해 적절히 올라오는 감칠맛은 담백하면서도 개운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빛깔까지 운치를 더한다. 양지, 민어, 토란, 송이, 쑥 등 맑은장국에 어울리는 재료를 떠올리면 오랜 세월 전해진 맛의 설계의 밑절미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소면을 말면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음식의 극치인 국수장국이 된다. 

못잖은 간으로 젓갈간이 있다. 두장 못잖은 맛난 짠맛을 쥔 새우젓간을 한 달걀국, 콩나물국, 젓국갈비 등도 재료의 감칠맛을 두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끌어올린 진미이다. 명란젓으로 맛을 더하는 방식도 있었다. 일본식으로 맑게 끓여내는 ‘지리’에 견주어 새우젓간이나 명란젓간의 개운하면서도 무게 있는 맛의 설계를 다시 생각할 여지가 더욱 자랄 듯하다. 

된장은 된장대로 채소 또는 나물의 풍미와 잘 어울린다. 배추된장국·시금치된장국 등의 예에서 보듯 구수함이 감도는 깊은 맛은 이 자체로 하나의 계통이 될 수 있겠다. 그 풍미와 질감이 앞서 든 예의 간과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꺼낸 말은 수다하지만, 역시 생각하면서, 비교하면서 맛을 보아야 그 차이도 섬세하게 가릴 수 있으리라. 여기 온도를 달리해 냉국이라든지 겨울 동치미까지 계통과 체계를 잡아 보면 어떨까. 국탕. 훌훌 마시기 좋은 데서, 식은 밥 한 덩이 풍덩 빠뜨리기에 좋은 데서 그칠 것만은 아니다. 간장간, 젓갈간, 된장간의 국탕 그리고 냉국 및 동치미 등 저마다 다른 풍미와 질감이 제 개성대로 계통과 체제를 이루자면, ‘따끈한 국 사발이 간절한 계절’을 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리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기획이 있어야 하리라.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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