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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에 ‘가짜뉴스 공장’이 있었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남을 만한 문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가짜뉴스의 레토릭이 보수 기독교의 레토릭과 비슷하다는 점은 페미니스트들도 계속 주목해왔던 문제였다. 한겨레가 이 ‘합리적 의심’이 ‘팩트’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가짜뉴스에는 올해 초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극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퍼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난민에 대한 공포가 갑작스럽게 형성됐고, 그렇게 자라난 반난민 정서는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거짓말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 중에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여성과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을 떠올리게 한다.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전 총재였던 장마리 르펜의 딸이다. 장마리 르펜은 강고한 남성 가부장의 얼굴을 한 극우였다. 그는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반프랑스 인종학살”이라고 불렀다. 당시 국민전선의 반유대주의와 여성혐오적 성격은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 확장에 방해가 됐다. 아버지 르펜 시절 국민전선에는 남성 지지자가 월등히 많았다.

반전은 마린 르펜이 당권을 잡고 아버지 르펜을 숙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축출함으로써 딸 르펜은 반유대주의 극우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국민전선을 현대화시켰다. 그는 오히려 국민전선이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설파하는데, 그때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표방하고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딸 르펜은 확실히 세련되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국민전선의 약진을 젠더정치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딸 르펜 이후 당의 여성 지지자층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의 포퓰리스트로서의 진가가 드러난다. 포퓰리스트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신념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대중이 겪고 있는 위기를 과장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 자리에 ‘대중 vs 엘리트’라는 전선이 형성된다. 예컨대 ‘진짜 프랑스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기득권의 정치적 올바름 추구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식이다. (난민 논란 당시 윤서인이 정우성을 비난했던 방식을 복기해보자.) 그렇게 포퓰리스트는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의 분노와 원한의 감정에 어필한다.

기득권과 싸우고 대중에게 말 건다는 이유에서 포퓰리즘을 ‘정치적 가능성’으로 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포퓰리스트는 오직 나만이 국민을 대변할 수 있으며, 오직 나를 지지하는 자들만이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다원주의를 배격하고 혐오와 배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 정치를 추구한다.

르펜의 ‘여성 정치’가 어떻게 포퓰리즘으로 휘어지는지 보자. 그는 “나는 프랑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는가? 난민이다”라고 선동한다. 그리하여 르펜에게 페미니즘은 정치학이 아니라 수사학이 되어 버린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여성에 대한 진보적 정책 기조를 유지했을까? 문득 극우 정치인의 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자가 한국 여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포퓰리스트가 페미니즘을 이용할 때만큼이나 곤란한 것은 페미니스트가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기를 선택할 때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끌어오기로 마음먹기는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다. 그러나 작가 들개이빨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인간을 혐오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쉬운 건 결코 위대할 리 없지.” 우리의 운동이 좀 더 위대해지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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