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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장관의 외제차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권영세 장관이 자신의 좌우명같이 강조해 왔다는 라틴어 법 격언에 대한 이야기다. “아우디 알테람 파르템, 상대방 당사자의 말에도 귀 기울여라(Audi alteram partem, listen to the other side).” 양 소송 당사자의 의견을 듣기 전까지 판결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법언이다.

권 장관은 통일부 자문위원들과의 회의를 이 좌우명으로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팀 내에서 가장 비둘기파로 알려진 그가 포퓰리즘에 빠져 자기관리를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정치인 장관의 상투적 수법이라며 가벼이 넘기는 매너리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런 법언은 비둘기파냐 매파냐라는 외교 정책 방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진리 추구 방식 혹은 더 나아가 실체적 진실을 향한 간단치 않은 법철학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어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사실 사법 정의 즉 실체적 진실을 찾는 과정에 당사자주의와 직권주의 간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오래된 결론이다. 당사자를 강조하는 ‘아우디 알테람 파르템’이 당사자주의에 치우친 듯하지만 사법부가 앞서서 실체적 진실을 밝힐 책임이 있다는 직권주의를 배제하는 법언 또한 아니다. 제대로 된 재판부라면 진실 발견을 위한 공식적이고 철저한 조사 능력에 기반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경우 오히려 당사자주의는 보완적 기능으로도 충분하다.

문제는 진실이 하나가 아니라고 보는 수많은 라쇼몽 현상들이나 과거의 사건이 미래에는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되지 않는다는 수많은 ‘역사가의 진실들’ 앞에서 직권주의가 사법 꼰대들의 횡포로 보이는 경우이다. 기억 재생에 의존하는 인간의 분쟁이나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역사 투쟁에서 사법 권력의 과잉 즉 ‘적극적 판단자’라는 존재는 창의성의 과소를 낳을 수 있다. 사법부가 소극적 판단자이길 바라지만 이럴 때일수록 사법부의 권력의지는 우리의 기대를 배신한다. 권 장관의 아우디론은 판단 권력 스스로가 ‘소극적’일지 ‘적극적’일지를 논하는 격언은 아니지만, 적어도 각 당사자가 ‘적극적’일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야 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곱씹어야 할 정치적 덕목으로 이어진다.

검찰 출신의 많은 법조인들이 사용하는 몇몇 논법들은 반부패 권력과의 투쟁에서 자라난 직권주의적 정치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자유 심증을 지닌 적극적 판단자가 사안의 본질에 대한 선악 혹은 합법 판단을 하고 나서야 정치 과정이 개시된다는 직권주의적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정치의 결과는 분명하다. 정치가 당사자들 간의 토의 과정에서 구성되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공간에 고정된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이에 대한 선행적 사법 판단에 좌우되게 된다. 그 결과 사법적 정의의 완전성과 고고성을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타협과 조정이라는 정치적 덕목은 기회주의로 배척되기 쉽다. 판단의 논증 과정의 적실성이 권력 정당성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직권주의식 정치는 논리의 무오류성에 매달리게 되고 타협은 수용하기 어려워진다.

때로는 사법부조차 평범한 인간 군상의 집합체요 따라서 이익 집단임을 감출 수 없다. 선발된 기능인으로 이루어진 고급 월급쟁이들이기도 하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신의 의지를 해석할 특별한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더 이상 그들에게 직권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가식이다.

당사자주의는 그래서 직권주의의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기능적 인간들에 불과한 사법 집단을 위선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지혜로운 자들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과정에 진실이 구성된다는 사고는 사회적 대화와 숙의에 대한 낙관론에서 시작한다. 합의되고 구성된 진실도 실체적 진실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점을 법조인들이 수용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정치학에서는 그것은 이미 공인된 정치적 방법의 하나다.

이번 정권에는 서울법대 출신 장관만 5명 이상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훌륭한 통일부 장관 외에도 각종 외교 경험을 통해 외교적 레토릭을 체화한 외교부 장관도 있다. 당분간은 대통령과 이들의 관계가 한국 정치와 외교의 미래를 좌우하게 생겼다. 우리 법무장관이라는 무의식이 갖고 있는 법조 동류 의식은 대통령의 정치 교사가 누군인가에 대한 답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담을 주고 싶진 않지만 권 장관의 아우디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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