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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업주부다. 아내와 합의해 가사 노동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상은 여느 주부와 같다. 밥 짓고, 아내를 출근시키고, 청소하고, 책 읽고 저녁엔 아내의 퇴근을 기다린다. 아내와 저녁 밥상에 앉아 온종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그러니 아내가 늦기라도 하면 절로 잔소리가 나온다.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아내는 그를 생각해 되도록 일찍 귀가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서로에게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그도 아내도 현재 삶에 불만이 없다.
하지만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간혹 얼굴 볼 적마다 언제까지 집에서 허송세월할 거냐고 책망한다. 집이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노동 공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집에 있는 그의 존재를 ‘無(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집 밖으로 나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바란다. 그는 가족과 부딪칠 때마다 생각한다. 혹시 나도 전업주부인 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낮에 슈퍼마켓에서 혼자 장을 볼 때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주말에 아내와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를 만나고 며칠 뒤, 두 아들을 키우는 친구를 만났다. 결혼한 뒤에도 꽤 오래 직장을 다녔고, 근래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는 얘기 끝에 이리 말했다.
“내 아들들이 잘 커서 처자식 잘 먹여 살려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지 뭐.”
엄마로서 아들이 제 몫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깃장이 생겼다. 왜 ‘처’는 아들이 잘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인가? 남자는 기필코 그래야 하는가?
며칠 전 한 설문 조사에서 “남편이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아내가 할 일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8.8%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서 반가웠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또 다른 성이든 자기 스스로 선택한 역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니. 그러니 아들 있는 친구여, 아들의 얼굴 모를 처자식 걱정은 내려놓고 그저 아들이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자라길 바라시게.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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