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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시절에 처음 만났던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은 오랫동안 내 의식과 혼을 지배했다. 삶에서 누구나 한번은 겪는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경험일 것이다. 자식 잃은 젊은 아비의 지극한 슬픔을 알 리 없었던 어린 소녀는 시에 내장된 사무치는 그리움의 정서에만 꽂혔다. 이후 나는 바닥 모를 그리움과 슬픔에 흔들릴 때마다 홀로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대면서 그 시를 되뇌었다. 세상의 험한 돌부리에 넘어지면서도 상처를 치유했고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엄마가 된 이후에야 전쟁과 분단에 찢긴 시인의 생애와 ‘유리창’의 시적 배경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
오래 잊고 지냈던 그 시가 어제 팽목항에서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안산에서 출발해 팽목항까지 걸었다. 그 여정의 마지막날인 지난 14일 아침, 필자도 진도군청을 출발해 22㎞를 걸어서 오후 4시 팽목 바다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는 이미 봄볕이 따스했다. 염장마을 가로변 밭에는 월동배추들이 노오란 질긴 속잎을 살찌우고, 매정마을 파밭에서는 바람이 건듯 스칠 때마다 파향기가 사방으로 날렸다. 선현들이 이르기를 난초 가까이 사는 이에게서는 저절로 난향이 난다고 했다. 그 자연 속에 사는 주민들은 1000명이 넘는 이들에게 정성스러운 밥을 대접했다. 삼거리 주유소 앞, 비록 땅바닥에 앉아서 먹는 주먹밥이었지만 김, 파래, 참기름을 섞은 밥은 금방 뭉쳐내어 무척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도의 배려는 그렇게 섬세했다. 팽목 바다는 비취빛 호수 같았다. 바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요했다. 그곳에 바다를 등진 채 선혈빛 등대와 하늘나라 우체통이 서 있다. 핏빛 등대의 중앙에 노란 리본이 선명하다. 등대로 가는 길목에 매달린 편지들은 300일의 바람에 시달렸던가? 남루하게 마른 몸으로 쉼없이 해풍에 몸을 파닥인다.
“하얗게 웃고 있구나/ 죄없이 눈부시구나/ 이 생에 못다한 말 자줏빛 꽃술로 품고/ 너는 거기 함박꽃나무 희디흰 얼굴로 앉아서”
한 어른의 헌시가 쓰여 있다.
봄이 오면 가버린 아이들이 함박꽃으로 피어날까? 모진 추위 이겨내고 땅 밑 어디선가 일제히 아우성치며 솟구쳐오르는 씀바귀, 민들레로도 오겠지. 그런데 누군가의 두런대는 독백이 칠흑어둠을 가르는 빛화살처럼 가슴속으로 와 꽂힌다. “그날 바다는 오늘보다 더 잔잔했다는디. 아그덜이 배에서 뛰어내리기만 했으면 되는디. 근처에 어선들이 빽빽이 있어서 다 구조했는디. 그저 배 밖으로 나가라고만 했으면 다 구조하는디….”
다투어 터져나올 봄꽃들을 상상하는 가슴에 일순 해일이 덮쳐든다.
왜? 왜? 왜? 왜 그랬냐고?
큰소리로 중얼거려 본다.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이 점이 미치도록 궁금하다.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 300일 동안 숱한 진단, 분석, 추측이 갈등, 분열, 적대의 거리를 더욱 더 벌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배가 침몰한 ‘사고’. 그리고 국가가 재난당한 국민을 구조하지 ‘못하거나’, ‘안 한’ 사건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나는 ‘안 한’ 것이라는 추측을 단호히 거부하고자 한다. 천신만고를 헤치고 오늘에 다다른 우리의 국가가 그럴 리는 없다고 믿고 싶다. 6·25전쟁 와중에 국가 부패의 막장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국민방위군’ 사건만 해도 그 즉시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았던가.
일부 실종자 가족과 자원봉사자들이 남은 전남 진도 팽목항에 눈발이 어지러이 휘날리고 있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실종자의 귀환을 염원하는 노란 리본이 그려진 등대가 외로워 보인다. (출처 : 경향DB)
피로감을 운위하는 이들에게, 엉뚱하게 경제살리기를 뇌까리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자식 잃은 아비가 밤마다 유리창에 얼굴을 부비며 운다. 눈물 얼룩진 눈에 별이 된 아이가 젖은 채 반짝인다.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자식은 모든 부모에게 보석이다.
유시춘 | 작가·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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