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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예산 편성 과정에서 부처예산을 기획재정부가 가위질하는 것을 두고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재원마련에 따른 조치가 아니냐는 풍문이 관가에 돈 적이 있었다. 진위 여부야 당장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실 그간의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 탓에 남북관계에서 돈 문제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어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출한 비핵화에 관한 합의가 이행되고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체제를 보장받는다면 북한의 개방은 서서히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경협에 따른 재원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일찌감치 우리 정부는 남북이 종전의 대결구도를 청산하고 공존구도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미리 준비해놓은 바 있다. 남북협력기금법에 따라 설치된 남북협력기금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 기금이 조성된 1991년에 250억원으로 시작하여 올해 4월까지 총 13조원가량이 조성되었다. 모으기만 한 것은 아니고 법에서 정하는 용도에 따라 기금에서 꾸준히 집행되어왔다. 그래서 쓰고 남은 적립금은 2017년 말 기준으로 대략 8200억원 정도가 된다. 한편, 기금 외 다른 재원조달 창구로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의 활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법적인 걸림돌이 있긴 하나 이를 해소한다면 남북경협사업에 투입이 가능하다. ODA 전체 예산은 올해 3조원가량이 잡혀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재원수준으로 앞으로의 남북경협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물론 경협비용이란 것이 사업의 주체, 내용과 규모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어 적정 재원규모도 딱 부러지게 내놓을 순 없다. 그렇지만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기 전의 지출 추세로 보자면 현재 수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개념상 적지 않은 논란이 있긴 하나 아무튼 통일비용을 계산해 이를 필요재원의 최대치로 잡고 협력단계에 따른 재원규모를 거꾸로 가늠해볼 수도 있다. 참고로 독일의 경우 통일비용이 20년간 대략 3000조원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남북이 통일된다고 가정했을 때 얼마의 돈이 필요할까.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0년 8·15 광복절 축사에서 통일세 도입을 제안해 통일비용에 관한 논의가 잠시 활발히 이루어진 적이 있다. 당시 연구기관 등에서 내놓은 통일비용은 적게는 수십조원에서 많게는 수천조원으로 제각기였다. 이러한 편차는 가보지 않았던 길에 대한 예측이 그만큼 쉽지 않음을 방증한다.

이 전 대통령이 통일세 문제를 끄집어냈을 때 각계에서 날선 비판이 쏟아졌다. 먼 훗날을 미리 대비하자는 뜻으로 아무리 좋게 받아들이려 해도 당시 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관계에 비춰본다면 제안이 너무나도 뜬금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급변한 한반도 정세만큼 남북경협을 위한 재원조달이 예상보다 시급해질 수 있다. 남북협력기금과 ODA 예산뿐만 아니라 국채 발행, 국내외 민간부문의 투자, 국제사회·기구의 공여 등도 자금조달 창구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모름지기 경협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 정부의 자금이 주된 돈줄이 될 터다.

이 말은 결국 증세를 포함한 재정개혁에 관한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매사에 철저하기로 소문난 독일도 통일비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낮게 잡아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러 심각한 문제와 갈등을 호되게 겪은 바 있다. 우리는 독일의 사례를 지렛대 삼아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정개혁의 틀 안에 경협에 따른 재원소요가 반영돼야 한다. 또 증세가 필요할 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므로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불필요하거나 새고 있는 재정지출을 반드시 도려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남북경협을 위한 재원조달 논의가 심도 깊게 시작돼야 할 시점이다.

<김현동 | 배재대 교수·조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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