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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만 같다. 모두들 제각기 다른 생각과 입장, 각양각색의 고민들을 머리와 마음속에 가득 안고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또 다른 작은 목소리들을 그 거대한 포효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잊어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기억하고 있는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단 내 성폭력’ ‘미술계 성폭력’ 등 온갖 분야에서의 이른바 ‘성폭력 피해 고발’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왔다는 것을. 비록 이제는 거의 모든 언론 지면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린 그 사건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 언론은 “최순실이 고마운 사람들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카드뉴스를 내기도 했다.

우리 헌법은 비상한 시국에 대한 최후의 보호장치를 잊지 않았다. 1987년 국민들이 피땀으로 성안해 낸 민주헌법은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 제도를 구비하고 있다. 탄핵 결정으로 민사상·형사상 책임이 면제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성희롱 관련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나 미시적 일상 속 뿌리 깊은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투쟁은 이 거대한 싸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성희롱 문제만을 두고 생각해 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위를 이용하였거나 업무상으로 행한 성희롱이 아닌 사인 간의 성희롱은 구제 대상으로 삼지도 않거니와, 그나마도 피해 발생 시점으로부터 1년이 경과하였다면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사 불법행위 손해배상은 재판에 따른 시간과 비용도 문제가 되거니와 원칙적으로 3년의 단기소멸시효 적용을 받으므로 오랜 시간 후에 어렵사리 용기를 낸 피해자에게는 실효적 구제책이 되기 어렵다. 성희롱이든 성폭력범죄든 두 가지 모두, 한 개인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나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에는 ‘강간이나 강제추행을 당한 것도 아니잖아’라고 하는, 틀에 박힌 편견에 또 한 번 분루를 삼켜야 하는 때도 많을 것이다.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한 법과 제도, 우리의 사회적 인식에는 여전히 미비한 점이 많다.        

법에 정해진 대로 따르는 길은 차라리 덜 어려울 수 있으나,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싸움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이 싸움이 정의를 향한 것임을 안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용기 있게 진실을 드러내는 피해자들에게 따뜻한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소중한 노력들, 바로 그것이 내일의 대한민국을 보다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촛불을 들고 외치자. 우리는 당신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촛불과 함께 도도히 타오르는 우리의 다른 모든 희망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도 꼭 기억하자.

박찬성 | 변호사·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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